[문화의 창] 인생 끝에 마무리할 숙제는 무엇인가?

입력 2026-01-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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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엊저녁 동네의 ‘쩜오책방’에 나가 ‘교양의 쓸모’라는 내 책을 두고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돌아왔다. ‘쩜오책방’은 교하의 책방인데, 동네 사람들이 조합을 꾸려 운영하는 곳이다. 새해 네 번째 금요일 저녁에 열댓 명이 모였다. 몇몇만 낯이 익을 뿐 다른 분은 낯설었다. 동네책방에서 한동네 사는 작가에게 이야기를 청했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서른 해 넘게 전업작가로 밥을 끓이며 산 인생 서사를 펼치니 마치 장강 같았다.

머리가 여물지 않은 청소년으로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시와 철학을 독학하다가 등단을 하고 출판사 취업을 거쳐 20대 후반 독립출판사를 창업했다. 그 뒤 출판사를 접고 전업작가의 길로 나섰다. 검은머리가 반백이 되어 돌아보니, 전업작가의 길은 아득하고 험했는데, 용케도 밥 끓이며 버텨냈구나, 하는 뿌듯함이 없지 않다. 내 인생 서사는 상류에서는 흐름이 급류처럼 빨랐다가 완만한 들판을 만나면 느려졌다. 이야기가 굽이굽이 굴곡을 거쳐 절정에 이르자 웃음과 박수를 치며 호응해주었다. 이미 책방 바깥은 어두웠고, 어둔 허공에선 눈발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늦은 밤에 행사를 끝내고 책 몇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발을 받으며 돌아왔다.

열세 살에 첫 시를 썼다. 평생을 시인이라는 통나무배에 의지한 채 세월의 바다를 건너며 봄날 훈풍과 꽃시절을 지나고, 태풍과 해일을 겪었다. 세상의 날씨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했다. 그걸 고스란히 겪어내는 동안 더러는 행복하고, 더러는 쓸쓸했고, 더러는 고달파서 죽고 싶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다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그 나름의 불행을 안고 있는 법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도입부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이게 어디 가정에만 국한되는 사정일까? 우리가 온몸으로 견디고 써내려간 인생 서사도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했을 테다. 인생이란 외투의 안쪽에는 그 행불행이 만든 얼마나 다채로운 무늬들이 숨어 있을 것인가!

칠십 인생이 마치 외삼촌 심부름을 나갔다가 돌아온 만큼이나 찰나다. 돌아보니 살아온 날은 길고, 앞으로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무엇을 새로 도모하기엔 늦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건 내 살아있음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것일 테다. 사슴같이 순진하던 소년은 어디로 가고 풍파로 주름이 가득한 노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거울을 볼 때 주름진 노년의 내 얼굴이 낯설어 흠칫 놀란다. 장마 때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만큼 빠르게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면 절로 탄식이 나오지만 다행히 눈물은 솟지 않는다.

어린 시절 노는 데 정신이 팔린 내게 어머니는, 숙제는 다 했니 하고 채근하듯이 물었다. 나이가 들자 숙제를 다 했냐고 내게 묻는 사람은 없었다. 종종 꿈속에 죽은 어머니가 나와 숙제는 다 마쳤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을 못한 채 곤혹스러워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깨면 방안의 기물들은 제자리에 고요하고, 물론 나를 채근하는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방금까지 내 머리를 받치던 베개 한가운데는 움푹 패었고 머리칼 두어 개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과연 지구별을 떠나기 전에 내가 마쳐야 할 숙제는 무엇일까를 떠올린다. 어제보다 오늘은 조금 더 착하고 순해지기를, 세상과 타인에 보다 더 관대해지기를, 나 스스로 영혼의 점진적 진화를 이뤄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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