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수요 폭증 속 증설 지연은 곧 점유율 상실…돈보다 ‘타이밍’이 경쟁력
증손회사 지분 50% 완화는 금융 특혜 아닌 ‘리드타임 단축’용 제도 정비

반도체 투자에서 가장 값비싼 비용은 ‘시간’이다. 공장 건설에만 수년이 소요되며, 그 안에 들어갈 핵심 장비 역시 발주부터 반입, 설치, 공정 안정화까지 막대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속도가 곧 경쟁력이 되는 치열한 싸움이 펼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처럼 글로벌 공급이 제한된 핵심 장비는 대기 기간이 길어, 발주 시점이 곧 생산 시점을 좌우한다. 라인이 가동된 이후에도 수율을 끌어올리고 고객 요구 사양에 맞춰 검증을 거치는 데 추가 시간이 붙는다. “돈을 벌어서 투자하면 된다”는 논리가 반도체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유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시대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장비를 가져놓고 세팅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 그러면 시기를 놓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폭증하는 국면에서 증설이 한 박자만 늦어도 공급 계약을 놓치거나, 고객의 설계·검증(퀄) 사이클에서 경쟁사에 밀릴 수 있다. 투자 결정이 늦어질수록 장비 발주와 라인 구축이 뒤로 밀리고, 이는 곧 생산·출하 일정 지연으로 이어진다. 반도체 시장에서 ‘한 세대’ 차이는 곧 점유율 격차로 직결된다.
문제는 치열한 반도체 ‘속도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한 번에’ 대규모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첨단 팹과 장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수십조 원 단위로 커졌지만, SK하이닉스처럼 지주회사 체제의 손자회사는 국내 자회사(증손회사)를 설립할 때 100% 출자 의무를 져야 해 외부 자금을 구조적으로 끌어오기 어려웠다. 투자 타이밍이 자금조달 규제에 가로막히는 상황이 반복돼 온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증손회사 의무 지분율 ‘100%→50%’ 완화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공정거래위원회 승인 등 조건을 달아 원칙은 유지하되, 나머지 50%를 국민성장펀드 등 외부 자금으로 채워 투자 목적의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구상이다. SPC가 공장과 장비를 보유하고 기업은 장기 임차료를 내는 금융리스 구조가 가능해지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설비투자를 한 번에 집행하지 않아도 된다. 초기 자금 부담을 낮추는 동시에 장비 발주와 라인 구축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자 리드타임 단축 효과가 크다는 평가다.
이재명 대통령도 “금산분리 원칙으로 금융 조달을 제한하는 이유는 독점의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서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첨단산업에선 이미 다 지나가 버린 문제”라고 언급했다.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는 특혜가 아니라, 기술 경쟁이 속도전으로 전환된 현실에 맞춘 예외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전문가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금융·규제 구조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AI·반도체 등 미래 산업에 필요한 투자 규모는 기존 증자나 차입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며 “프로젝트 단위 SPC 설립이나 공동 투자 구조 등 유연한 자본 채널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금융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처럼 전략적 자본이 첨단 산업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금산분리 완화나 정책적 지원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결국 핵심은 기업이 투자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제도가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