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콘텐츠 소비는 긴 호흡을 전제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맥락을 기억해야 했고, 그 기억은 인물과 사건, 감정선의 연결을 전제로 했다. 제품의 기능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지자 많은 브랜드는 이 한계를 돌파할 방법으로 스토리텔링을 선택했다. 하나의 유기적 서사를 덧입힌 광고는 제품에 대한 호감을 넘어, 브랜드 자체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랄프 로렌이 미국 동부 상류층 신화를 차용해 ‘올드 머니’라는 이미지를 굳힌 방식, BTS를 비롯한 여러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세계관을 통해 팬덤과 정서를 공유한 방식, 공간 자체에 감성을 입혀 경험을 판매하는 F&B 브랜드들의 전략은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핵심은 제품이 아니라 ‘이야기’였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 이야기의 다음 장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는 미디어 콘텐츠 역시 고전적인 서사 구조를 반복하거나 변주하며, 이미 오래전부터 스토리텔링의 틀 안에서 움직여 왔다. 그렇게 서사는 일상의 표면뿐 아니라 소비와 경험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숏폼이 지배하는 오늘의 정보 환경에서 기억과 주체적 이해는 더 이상 필수 항목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야기의 호흡보다 짧은 몇 초가 주는 ‘느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크롤 속에서 끊겨나온 조각들은 맥락을 요구하지 않고, 뇌는 이해가 아닌 반응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소비자는 더 이상 스토리를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극을 선별해 ‘흡입’하는 존재가 된다. 이야기보다 느낌, 이해보다 반응, 의미보다 속도가 우선시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리에 앉아 몇 분 이상 한 콘텐츠에 몰입할 여유가 없다. 하나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영상과 텍스트를 차근차근 따라가던 시간, 그에 필요한 인내심과 집중력, 그리고 정신적 여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앞세웠던 ‘세계관’ 트렌드는 점차 희미해지고, 길이가 2분 남짓한 노래조차도 30초짜리 하이라이트를 위해 모든 사운드와 가사를 쏟아붓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지금은 서사가 필요 없는 정체성이 더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다. 브랜드 피드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분위기 조각으로 채워지고, 한 장면만 스크린샷해도 ‘무드 보드’로 기능하도록 설계된다. 이제 충성은 이야기에 기반하지 않는다. 충성도는 사용자가 이입할 수 있는 분위기, 이미지, 감정의 잔향에 기반한다.
Rhodes, 버버리 같은 유명 브랜드들 역시 더 이상 일관된 서사를 구축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잘라낸 듯한 비선형적 이미지들을 조합해 피드를 채운다. 간단한 레시피 영상부터 국회 청문회 클립까지, 오직 사용자의 ‘관심사’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뒤섞인 알고리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다. 이 방식은 긴 시간 브랜드를 따라가야 이해되는 서사적 구조보다, 어떤 게시물을 골라도 즉시 느껴지는 ‘분위기와 감정’에 의존하는 편리함에 가깝다. 맥락을 해석하고 사고를 개입시켜야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보다, 반짝이고 직관적인 이미지의 모자이크가 정체성을 파악하는 새로운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변형은 단순히 문화와 제품 소비 방식의 변화로 끝나지 않는다. 뇌는 반복되는 환경에 맞춰 구조를 바꾸는 기관이다. 짧고 강한 자극을 통해 도파민을 보상받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람은 더 이상 서사적 사고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의 연결, 복잡한 서사 구조, 인물의 내적 갈등 같은 요소들은 ‘버거운 사고’로 분류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압축된 이미지, 해체된 감정, 즉각적 호소력이다. 스토리 없는 브랜딩, 앨범의 유기적인 의미 대신 후렴구 조각만 소비하는 문화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다. 지금의 콘텐츠는 의미를 축적하지 않고, 그때그때 반응을 유도하며 소멸한다.
AI는 이 환경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기술이다. LLM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는다. 단어와 문장의 통계적 확률 구조를 예측할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AI가 이야기 능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한다. 이 착각의 이유는 AI가 서사를 생성해내서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서사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AI의 출력물이 맥락 없는 말의 덩어리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소비자는 ‘느낌’의 파편만 취하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미 서사적 사고가 필요 없는 상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결국 AI는 서사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서사력이 약해진 사회에 맞춰 최적화된 기술일 뿐이다. 사회가 새로운 형태의 이해 영역에 도입한 것이다.
문제는 이 흐름이 사회적 사고, 민주주의적 토론, 정책 결정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맥락을 따라가야만 이해할 수 있는 정치 담론은 사라지고, 10초짜리 분노 영상과 자극적 문장이 여론을 대체한다. 진짜 위험은 가짜 뉴스의 확산뿐만 아니라,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분절된 정보에 익숙해진 사회는 전체를 보는 능력을 잃고, 결국 가장 소란스러운 파편에 끌려다니게 된다. 요약하자면, 서사를 잃은 사회는 판단을 잃는다. 판단을 잃은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AI는 짧은 자극에 최적화된 기술이다. 챗봇의 응답 속도는 인간의 사고 과정을 압도하고, 이미지 생성 모델은 몇 초 만에 시선을 빼앗을 결과물을 생성한다. ‘생각’할 시간과 ‘반응’할 시간 중 어느 쪽을 우선하는지 선택하라고 묻는다면, 지금의 사회는 거의 전적으로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기다림은 뒤처짐이 되었고, 이해는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즉각적 보상 구조가 일상이 되자, 사고력은 불필요한 기능으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인지 체계를 재구축했다. 이 전환이 단순한 문화적 변화라면 현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책, 산업, 교육, 심지어 국가 단위의 기술 개발 전략까지 서사를 제거한 사고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AI 정책과 국가 R&D 전략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실제로 세계 대부분의 AI 전략 보고서를 살펴보면, 기술 철학이나 연구 목적보다 GPU 보유량, 투자액, 기업 숫자, 데이터센터 규모 같은 지표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기술 개발의 속도와 수익 그래프는 존재하지만,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라는 질문이 부재한다. 미국은 패권 유지, 중국은 국가 통제력 확장, 일본은 노동력 대체라는 프레임을 앞세우며 AI 개발을 ‘기술적•국가적 우위 경쟁’으로 재편했다. 문제는 그 경쟁이 ‘기술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확보했는가’로 측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기술을 ‘수량화’하는 국가가 우위를 점하는 게임으로 바뀐 것이다.
성황리에 마친 경주 APEC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뉴스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엔비디아와 체결한 GPU 26만장 공급이라는 쾌거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들은 물론, 우리나라 R&D의 새로운 방향의 기반이 될 연구까지 확장될 이 공급 소식은 더할나위 없이 기쁜 희소식이다. GPU는 필수 자원이고, 이를 확보했다는 사실은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양은 비전의 크기를 보증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이 AI 인재•연구 생태계•윤리•거버넌스까지 동시에 설계하고 있고, 유럽이 규제와 기술 철학을 함께 구축하고 있으며, 중국이 산업-국가-AI를 단일 체계로 통합해 장기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전략은 ‘속도와 물량’ 중심에 지나친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쉽게 말해, 우리는 엔진과 기름은 확보했지만, 항해 지도를 갖고 있지 않는 셈이다. GPU 26만 장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국가적 자부심이 될 수 있지만, 그 기술이 향할 서사적 비전이 없다면 그것은 소금물을 부유하는 장식배일 뿐이다. 기술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를 제공한다. 방향을 만드는 것은 이야기, 즉 목적성이다. 서사가 없는 기술은 결국 타인의 서사를 복사하거나, 자본이 지정한 목적에 종속된다.
연구자와 개발자가 점점 줄어들고, AI 인재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이유도 단순한 연봉 차이가 아니다. 서사가 없는 연구는 영혼이 없는 노동이 되고, ‘왜’라는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 R&D는 결국 소모전이 된다. 지금 한국의 AI 개발 구조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보유’했다는 사실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물질에 가까운 형태의 기술 보유이며, 산업화 시대의 공장 모델을 첨단 분야에 그대로 이식한 셈이다. 지금도 많은 금액이라고 볼 수 없는 한국의 AI 관련 예산 중 기초 연구•윤리•AI 거버넌스•사회적 영향 연구 분야는 주력이 아니다.
서사를 잃은 사회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방향을 잃는다. 이야기는 개인을 설득하고, 조직을 설계하고,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다.
서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옛날 영웅담을 되살리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정책•산업의 목적을 다시 묻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른 AI가 아니라, AI가 왜 필요한가를 논의할 수 있는 사회적 서사 능력이다. 기술은 결국 이야기를 가진 문명만을 지속시킨다. 이야기를 잃은 문명은 속도만 남기고, 그 속도는 곧 파편화된 감각 속으로 흩어진다.
산업이 먼저 커져야 연구가 따라온다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술을 생산하는 국가가 아니라 기술을 수입해 조립하는 구조를 고착화한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만 가질 수는 없다. 그래프는 성장해도 서사는 축적되지 않는다.
GPU 26만 장이 상징하는 것은 AI 개발의 ‘물적 기반 확보’뿐만 아니라 AI 개발의 ‘서사 부재’일 수 있다. 기술은 쌓이지만 방향은 생기지 않는다. 목표가 없는 속도는 결국 자본의 우선순위에 종속되고, 사회는 기술의 주체가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낸 흐름에 탑승하는 객체가 된다. 국가가 기술을 보유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국가를 견인하는 형태다. 양질의 장비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국가 전략에 스토리가 사라지는 순간, 기술 개발은 항해가 아닌 표류가 된다.
저자 소개
반휘은은 글로벌 AI 거버넌스와 신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정책 컨설턴트이자 저술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디지털 인문학, 미디어철학, AI윤리를 전공하며 석사과정을 마친 후, 뉴욕 유엔본부의 (전)기술특사실 (현)디지털과 신기술사무국(전 Office of the Secretary-General’s Envoy on Technology, 현 Office for Digital and Emerging Technologies)에서 AI 정책 연구와 분석을 주도했다. 안보, 에너지, 노동, 건강, 법의 지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거버넌스를 위한 전략적 프레임워크를 개발했으며 20회 이상의 고위급 자문 회의를 주관하며 AI 정책을 구체화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주요 산업 리더들과 협력하여 AI 거버넌스의 글로벌 표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반휘은은, 디지털 윤리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현재는 AI 거버넌스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