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에 튀니지에서 10대 자매 고프란과 라흐마가 가출하여 이슬람 극단 세력 IS에 가담한 사건이 있었다. ‘올파의 딸들’은 그들의 어머니인 올파와 다른 두 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건의 배경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의 한 특징은 재연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 세 모녀가 과거를 재연할 뿐 아니라, 전문 배우들이 나온다. 한 명은 가끔 올파의 대역을 하고, 두 명은 가출한 두 딸의 역할을 맡는다. 일인 다역을 하는 남자 배우도 한 명 있다.
다큐멘터리에 재연 장면이 있는 건 드물지 않지만, 이 영화는 조금 특이하다. 보통 재연 장면은 먼저 관련자들의 회고와 과거 자료 등을 바탕으로 대본을 쓴 다음, 연기자들이 그것에 따라 연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재연이 즉흥적이다. 심리치료극과 비슷하다. 회고 직후에 혹은 심지어 동시에 재연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네 딸이 (두 배우 포함) 과거를 재연하고 있는데, 올파가 뒤에서 그걸 바라보며 “먹을 거 없을 때 저러고 놀았어요”라고 말한다.
이런 영화에 대해 평자들은 흔히 허구와 실재가 섞여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허구’라는 단어의 사용에 거부감이 있다. 일반 극영화에서는 상상의 사건을 연기하므로 허구란 단어가 어울린다. 그러나 연기자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연기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도 ‘허구’라는 건 조금 어색하지 않나. 그래서 이런 영화에 대해 나는 연기와 연기 아닌 게 섞여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연출된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참여자들이 스스로 행동하는 면이 강하므로 그게 나은 것 같다.)
그 둘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주는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다. 셋째 딸 에야가 엄마의 애인이었던 남자 위셈에 대해 위셈 대역 배우에게 얘기한다 (그가 역할을 하려면 알아야 하니까). 위셈은 딸들을 성추행했다. 밤에는 엄마와 있고 엄마가 일 나간 낮에는 딸 한 명에 특별히 관심을 주었다. 에야는 말한다, “그는 엄마의 남친이자 딸의 남친이었어요.” 여기까지는 연기가 아니다. 그런데 장면의 변화 없이 다음 컷에서 바로 ‘연기’로 넘어간다. 에야는 이제 위셈을 ‘그’라고 칭하지 않고 (대역에게) ‘당신’이라고 한다. “마음이 편해? 양심에 거리끼지 않아?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아버지는 그런 짓 안 해.”
연기 아닌 것에서 연기로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 영화 전체가 그러므로 특별하지 않다고 해도, 이 장면에는 추가적인 미묘함이 있다. 대역 배우가 일어나서 나가 버렸는데 그는 에야의 비난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다고 느낀 것 같다. 그는 그 장면을 계속하길 거부했다. 에야는 무의식적으로 가부장 사회의 남자 전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순간은 연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에야는 “저렇게 겁먹을 거 없는데…. 그냥 대사잖아요”라고 하지만 말이다.
올파와 두 딸의 흡인력이 강하다. 연기자가 아님에도 카메라 앞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이야기를 잘한다. 출연 여배우들도 그들과 잘 어울린다.(남자 배우는 재연 장면 외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장면의 하나는 두 딸이 두 언니 대역들을 처음 만날 때다. 그들은 보자마자 누가 고프란이고 누가 라흐마인지 바로 안다. 닮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정말 처음 만나는 순간을 찍은 걸까? 더구나 배우 선발할 때 가족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지 않았을까? 이 장면도 재연인지 모른다.
올파가 자기 대역을 할 배우보다 가출한 딸들의 대역을 더 궁금해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올파 대역 배우(튀니지에서 유명한 배우라고 한다)는 처음에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신기하네”라고 하지만, 사실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닐까 싶다.
큰딸 둘은 왜 집을 나갔나? 주된 원인은 물론 올파다. 그녀는 이슬람의 가부장 문화를 욕하면서도 그게 체화되었다. 자신이 어릴 때 당한 걸 딸들에게 되풀이했다. 집을 나가 IS에 가담한 두 10대는 이듬해에 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리비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고프란에게는 5개월 된 아기도 있었다. 가족은 그들의 영상을 보기는 했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