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딩입어
마치 거센 바람 속 사그라든 마지막 인간의 유언일까요? 이 단호한 명령어가 20일 아침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실시간 트렌드(실트)에 올랐는데요.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한 이들의 배려였죠.
한밤 새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서울의 아침 기온은 5도, 수원 5도, 대전 7도, 대구 12도. 얇은 외투로 출근이라는 작전을 수행하기엔 역부족이었죠. 기온별 옷차림, 경량패딩, 기모후드 등이 실트에 연이어 게재됐습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얇은 셔츠 차림으로 가을비를 맞던 시민들은 하루 만에 패딩과 니트를 꺼내입어야 했는데요.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아침 기온은 전날보다 5~10도 낮았습니다. 대부분 지역이 한 자릿수 체감기온을 보였죠. 강원 북부 산지에는 비가 눈으로 바뀌며 쌓였고 서해·남해 해안에는 순간풍속 초속 20m 안팎의 강풍이 불었고 동해와 남해 먼바다에는 풍랑특보가 내려졌는데요. 기상청은 “중국 북부지방에서 서해상으로 확장하는 찬 대륙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전국 대부분 지역의 아침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추위의 핵심은 바로 이 대륙고기압인데요. 대륙고기압은 시베리아와 중국 내륙에서 형성된 찬 공기 덩어리로 공기가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며 사방으로 퍼집니다. 공기가 하강하는 과정에서 구름이 걷히고 하늘은 맑아지지만 그만큼 지표면의 열이 빠르게 방출돼 밤사이 급격히 식게 되죠. 이를 ‘복사냉각’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고기압의 가장자리에서는 바람이 시계방향으로 불며 북서풍이 강하게 남하하는데 바로 그 바람이 시베리아의 차가운 공기를 한반도로 밀어낸 겁니다. 찬 공기가 서해를 지나며 수증기를 머금고 동해안에 도달하면 태백산맥에 부딪혀 비나 눈을 내리게 되죠.

반대로 저기압은 공기가 모여들며 위로 상승하는데요. 상승하면서 냉각·응결되어 구름과 비를 만들죠. 그러나 이번에는 고기압이 워낙 강해 저기압의 상승기류보다 하강기류가 우세했고 그 결과 구름은 걷히고 바람은 강해졌습니다. 이에 하늘은 맑았지만 체감 온도는 오히려 더 심해졌는데요. 이번 급 추위는 대륙고기압의 하강과 북서풍 유입, 복사냉각이 겹친 결과입니다.
다행히 이 추위가 오래가는 것은 아닌데요. 이동성이 강한 고기압이기 때문에 며칠 내로 동쪽으로 밀려나고 이번 주 후반부터는 서쪽에서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며 서울 아침 기온이 10도, 낮에는 19도 안팎으로 회복할 전망입니다. 다만 당분간은 평년보다 2~7도 낮은 날씨가 이어지고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죠.
이번 추위가 유독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직전까지 이어졌던 ‘가을장마’ 때문인데요. 추석 연휴부터 10월 중순까지 전국 곳곳에 비가 잦았습니다. 서울의 최근 한 달 누적 강수량은 370.8㎜로 평년의 3.5배에 달해 1973년 관측 이래 같은 시기 기준으로 가장 많았죠. 북쪽의 찬 공기와 남쪽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충돌하며 정체전선이 한반도 부근에 머물렀고 평년보다 늦게까지 세력을 유지한 북태평양고기압이 따뜻한 수증기를 계속 끌어올렸는데요. 김해동 계명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는 대전MBC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 이후 여름 장마는 짧아지고 가을장마는 길어지는 추세가 뚜렷하다”며 “올해는 그 흐름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 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모든 여파는 ‘가을의 꽃’ 단풍에까지 미쳤죠. 2025년 설악산 단풍시기는 평년보다 늦었는데요. 설악산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정상부는 10월 초부터 물들기 시작해 현재 해발 700~800m 부근까지 내려온 상황입니다. 평년보다 4~5일 늦은 속도죠. 절정 시기는 10월 25일 전후로 예상되죠. 설악산뿐 아니라 전국 주요 명산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속리산은 27일, 내장산은 11월 6일께 절정을 맞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또한 늦춰질 가능성이 있죠.
올해 단풍이 늦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습도 과잉과 일조량 부족을 꼽습니다. 단풍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햇볕이 충분해야 붉게 물드는데요. 하지만 가을장마로 해가 보이지 않는 날이 많았고 높은 기온이 엽록소 분해를 늦췄죠. 여기에 비가 잦다 보니 잎이 상하거나 병충해가 번져 색이 옅게 변한 곳도 있는데요. 이런 날씨 탓에 관광지 분위기도 가을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풍이 늦어지는 현상은 단기적인 기상 탓만은 아닌데요. 기온 상승으로 인해 단풍의 절정 시기가 해마다 늦춰지고 있죠. 산림청에 따르면 올해 단풍 절정 시기는 최근 10년 평균보다 4~5.2일 늦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종별로는 단풍나무류가 해마다 평균 0.43일, 참나무류 0.52일, 은행나무 0.50일씩 늦어지는 추세죠.
안타까운 건 이런 날씨의 급변이 단기적인 변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난해 기후변화연구저널에 게재된 보고서(우리나라의 기후변화 적응 미래전망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봄과 가을의 지속 기간이 10일 이상 단축된 반면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죠. 결국 한반도는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구조로 변한 겁니다.
기상청의 장기 강수 분석 역시 이를 뒷받침하죠. 과거 7월 초에 집중됐던 주요 강수기가 8~9월로 늦춰지며 9~10월에 두 번째 강수 집중기, 이른바 ‘투 피크(two-peak)’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여름 장마가 끝나면 가을장마가 이어지고 그사이 짧은 한기가 끼어드는 패턴인데요.

그야말로 ‘가을 실종’을 직면 중인 요즘입니다. 올해의 가을은 비로 젖은 초록잎이 붉게 물들기도 전에 떨어졌고요. 사람들의 옷차림은 반팔에서 패딩으로 단숨에 뛰었습니다. 비가 멈추자마자 찬 공기가 들이닥쳤고 단풍은 아직 산 중턱에도 닿지 않았죠.
짧게 스쳐 간 가을은 달력 위 날짜로만 남게 될까요? 봄과 가을이 사라지는 ‘계절 붕괴(Seasonal Collapse)’가 속상할 지경이죠. 체감으로는 이미 겨울 문턱, 이번 주 후반 평년 기온 회복과 만연한 단풍 구경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