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 일본, 중국, 인도 등 주요국들도 펀드를 산업 전략의 핵심 플랫폼으로 삼아 장기적인 산업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22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은 이미 펀드를 산업 정책의 핵심 도구로 활용해 왔다. 청정에너지,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장기적인 자본을 공급하며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대표적 사례다. 총 3690억 달러(한화 약 494조 원) 규모의 청정에너지 투자를 뒷받침하며, 정부 환경보호청(EPA)과 민간이 공동으로 출자하는 ‘그린뱅크(Green Bank)’ 구조를 도입했다. 세액 공제 혜택을 주면서 이를 양도할 수 있는 ‘제3자 양도’ 제도를 도입해, 민간 자본의 참여 기회를 확대했다.
초기 시장이 쉽게 형성되지 않아 장기적으로 시장을 육성할 필요성이 있는 신재생에너지 육성에도 펀드가 많이 활용됐다. 유럽연합(EU)은 탄소배출권거래제(EU ETS) 수익을 재원으로 100억 유로 규모의 혁신펀드를 조성해 단기 수익성이 불투명한 탄소포집(CCUS), 수소, 그린스틸 등에 2030년까지 과감히 투자하기로 했다. 일본 역시 2030년까지 20조 엔(약 200조 원) 규모의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펀드’를 만들어 수소·암모니아·원자력 등 에너지 전환에 장기 자본을 공급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단기 수익보다 장기 산업 기반 형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중국은 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을 택했다. 중국은 ‘국가 집적회로 산업투자펀드(일명 Big Fund)’를 앞세워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 국영 기업, 지방 정부가 함께 출자하는 이 펀드는 파운드리·장비·소재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현재 3기 펀드까지 출범했다. 여기에 수천 개의 ‘정부 가이던스 펀드(Government Guidance Fund)’를 운영하며 인공지능(AI), 전기차, 바이오 등 전략 산업까지 아우르는 공공투자 자금을 확보 중이다.
인도는 또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PLI(생산 연계 인센티브) 제도를 활용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결합해 패키지로 투자한다. 반도체·배터리·전자제조업 등에서 민간 투자와 글로벌 기업 유치를 육성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펀드보다 대규모 지원 정책이지만, 특정 산업에 국가 자본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정책 펀드의 성격이 강하다.
이처럼 글로벌 주요국은 펀드를 단순한 정책 수단이 아니라 산업 전략 차원에서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플랫폼으로 키우고 있다. 편드를 통해 민간 자본을 폭발적으로 끌어들이고, 불확실한 기술에도 선제적으로 투자한다. 정부 자본을 마중물로 민간 투자를 견인하고, 전략 산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다.
한국의 정책펀드들도 단기 성과와 정치적 목적에 그치지 말고 장기적인 산업 육성 전략에 따른 장기 자금 공급 플랫폼이 돼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글로벌 경쟁이 장기 자본과 생태계 구축에 의해 판가름 나는 현실에서,세금으로 조성한 펀드가 산업 전략이 아니라 정책 이벤트에 동원되면 혁신의 동력을 해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정부가 ‘성장펀드’, ‘혁신펀드’라는 이름을 붙여 대규모 자금을 조성하지만, 실제 운용은 시장 논리와 괴리되는 경우도 많다"면서 "정권 교체기마다 새로운 이름의 펀드가 등장하지만, 성과평가나 사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는 금융회사나 기업에 사실상 출자를 압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