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라인 없어 눈치보기만
“구조조정 직접 비용 줄여주는 인센티브 내놔야”

“먼저 움직였다간 손해를 볼 수 있다.” 정부와 석유화학 업계가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능력을 최대 370만t(톤) 감축하기로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기업들이 선뜻 구조조정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먼저 감산에 나설 경우 경쟁사에 시장을 내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 지원책의 불확실성까지 겹치며 셈법만 복잡해지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NCC 9개사의 평균 가동률은 79.2%로, 2022년 2분기 이후 손익분기 가동률인 85%를 밑돌았다. 일부 업체는 60%대까지 떨어졌다. LG화학(석유화학사업)·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 등 ‘빅4’의 영업이익은 2021년 9조 원대 흑자에서 지난해 1조 원대 적자로 돌아섰다. 불과 3년 만에 10조 원 가까운 이익이 사라진 셈이다.
산업 경쟁력 약화는 지역 경제에도 고스란히 전이됐다. 3대 석유화학단지인 여수의 국세 수입은 2021년 대비 지난해 33.5% 감소했다. 같은 기간 울산은 28.3%, 서산은 47.1% 감소했다. 전후방 고용 유발 인원이 43만 명에 달하는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는 고용 시장은 물론 지역 상권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달 정부와 업계는 NCC 생산능력 270만~370만t 감축을 포함한 구조개편에 합의했다. 단순 계산하면 NCC 설비 2~3개를 폐쇄하는 규모와 맞먹는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이 없고, 정부의 지원책이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은 탓에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호소하고 있다. NCC 통폐합을 둘러싸고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지만 확정적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간 곳은 아직 없다. 정부는 기업들이 먼저 설비 감축과 효율화를 추진해야 맞춤형 지원책을 마련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공정거래법 리스크’도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 기업 간 감산 합의가 공정거래법상 ‘부당 공동행위’로 제재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현행법상 인가 제도가 있지만 허가 사례는 사실상 없다. 다행히 국회에선 업계의 이런 고심을 반영해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특별법’이 발의된 상태다. 법안에는 공정거래법 특례 적용을 비롯해 산업용 전기요금 감면, 연구개발(R&D) 및 설비투자 보조금 등 정부 지원의 법적 근거가 담겼다.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중국에 이은 중동 지역의 증설 러시, 노조의 권한을 강화한 ‘노란봉투법’ 등도 기업들의 구조조정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실질적인 구조조정과 고부가 중심 사업 전환에 최소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보다 직접적이고 과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절차 간소화만으로는 기업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구조조정의 직접 비용을 줄여주는 인센티브가 빠져 있다. 규제의 족쇄를 풀고, 유예에 그친 세금을 아예 깎아줘야 기업이 주저 없이 나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