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무기 획득 시스템은 미국의 PPBEES 구조를 기반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기획(Planning)-계획(Programming)-예산편성(Budgeting)-집행(Execution)-평가 및 분석(Evaluation & Analysis)의 절차를 따라 사업이 추진된다. 문제는 이 체계가 사업당 최대 70여 단계의 절차를 거치며, 착수까지 평균 3~5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사업 기간이 10년을 넘기는 경우도 흔하다. 대표적으로 수출 효자 무기인 K-2 전차는 기획 착수부터 전력화까지 약 20년이 걸렸다.
기술 변화가 빠른 시대에 절차적 지연은 곧 기술 진부화로 직결된다. 무기체계 개발 중에 기술이 이미 구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고자 ‘신속시범사업’ 제도가 시행 중이나, 500억 원 미만의 단기 시제품 개발에 한정돼 대형 무기체계에는 적용이 어렵다.
이 문제는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 방산 선진국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민간 주도의 유연한 획득 제도를 도입해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 미국은 ‘OTA(Other Transaction Authority)’ 제도를 통해 복잡한 조달 절차를 우회하고, 민간 기업과 유연하게 계약해 신속한 기술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 팔란티어, 안두릴, 스페이스X 같은 혁신 기업들은 이를 활용해 수개월 내 계약 체결과 전력화를 달성한 사례가 많다. 영국은 ‘DASA(Defense and Security Accelerator)’라는 독립 기구를 통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기술을 조기에 발굴하고 군사적 활용을 촉진하고 있다. 민간이 자유롭게 제안하고, 정부는 시범지원과 평가를 통해 실전 도입까지 연계하는 방식으로 경제성과 속도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방연구개발국(Maf’at)을 통해 민간 기업이 기획 초기부터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대표 사례인 ‘아이언돔’은 민간 방산업체 라파엘과 엘타시스템스가 주도해 약 4년 만에 전력화에 성공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기획 단계부터 민간 참여를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기술 제안을 넘어, 소요 결정과 획득 기획 과정에 민간이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혁신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방 연구개발(R&D)과 무기체계 개발은 정부가 기획하고, 업체는 그 계획에 맞춰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정부 주도형 구조는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른 오늘날의 환경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기술 역량을 갖춘 민간기업이 무기 개발 초기 단계, 즉 어떤 무기를 만들지 결정하는 기획과 소요 단계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다.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기에 민간의 창의적 기술 제안이 현실화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이런 제약을 극복하려면 첨단 무기체계에 대해서는 민간이 먼저 기술을 제안하고, 정부가 이를 평가해 채택하는 ‘자율형 R&D 절차’로 전환해야 한다. 예컨대 ‘소요설명회-자율제안-정량평가-채택-개발’의 흐름을 제도화하면 민간의 우수 기술이 실제 전력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제도가 정착되면 무기 획득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줄고,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도 적시에 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 이는 기술 진부화를 방지하고, K-방산의 경쟁력과 대응 속도를 높이는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제도의 질이 국가의 번영을 결정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K-방산의 미래 또한 무기 획득 시스템이라는 제도적 기반의 질에 달려 있다. 한국의 현행 획득 시스템은 미국의 과거 모델을 모방해 정립된 것이지만, 이제는 세계 4강을 목표로 하는 K-방산에 걸맞은 우리만의 혁신적 제도를 마련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