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나 매체를 넘어 한국적 서사 구조와 정서는 오늘날 세계인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과연 그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과 삶에 대해 탐문하는 인문·사회학적 사유의 기반이 없었더라면 깊이 있는 이야기는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작품의 창작자들 역시 국문과, 문예창작학과, 사회학과 등 관련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문과 내려치기’는 여전하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문송합니다’라는 밈은 자조적 농담에 불과했는데, 요즘 대학가에서는 문·이과에 대한 우열의식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문과의 승리’로 해석한 기사에는 비판적인 댓글이 줄을 이었다. ‘노벨상은 뛰어난 개인의 성취일 뿐, 대다수 문과인들은 사회에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어떤 뛰어난 창작자도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 날 선 피드백과 질문, 치열한 사유의 열기는 개인의 감수성에 스며든다. 지적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언어와 세계가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일부 사람들이 향유하는 고상한 취향 혹은 비실용적인 교양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만들어낸 요람이다.
최근 문·이과 통합 수능 체제 아래, 이공계 수험생들이 인문계 학과에 대거 진입하는 이른바 ‘문과침공’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해당 학문에 대한 애정 없이 점수상의 유불리만을 고려해 지원했고, 결국 대학에서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외국어문학 관련 학과들은 줄줄이 폐과 위기에 직면했다. 학문의 전당에서 인문학은 점점 더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이 인문학의 효용을 판단하도록 방치한 데 있다. 2024년 정부부처 합동설명회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연구개발(R&D)예산은 AI와 과학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고 인문사회 분야는 전체의 약 1.4%에 불과하다. 미국은 10.3%, 독일은 8.4%, 영국은 5.1%를 인문사회 분야에 지원한다는 점을 참고해볼 때,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공적 지원을 통해, 예술을 꽃피우는 뿌리로서 인문학 생태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수상자 간담회에서 “문화 예술 영역이 너무 다양해서, 어떤 식으로 지원해야 할지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장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기초 인문학에 대한 투자 역시 긴 호흡으로 함께 고민되어야 할 과제다. 창작은 개인의 일이지만, 그 토대를 마련하는 건 사회 전체의 몫이다. 토양이 없다면 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