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세정 가스에는 ‘불화수소’라는 것이 있다. 반도체 회로를 깎고 닦는 공정에 필수적인 재료다. 미세공정이 정밀해질수록 더 높은 순도의 불화수소가 필요하다.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 왔는데, 2019년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금지 규제로 인해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불화수소 수입길이 막히며 기업들은 국내에서 생산된 불화수소에 눈을 돌렸다. 문제는 우리 기업들이 만드는 불화수소 순도가 99.9%로 일본(99.999%)보다 수준이 낮아 기업들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점이다.
순도를 올리려면 반도체 생산 현장에 투입해 수차례 테스트를 반복하고 피드백을 받아 제품을 개선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이 일본산 불화수소만 찾으며 그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당시 일본의 수출 제한이라는 위기로 우리 기업들에도 불화수소 납품의 길이 열렸다. 덕분에 품질을 업그레이드해 일본 제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고, 지금은 국내에서 자급이 가능하다.
이러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중요도는 일본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1980년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질주를 견제하기 위해 각종 합의와 협정 등을 동원해 일본 반도체 산업에 압박을 가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밀렸지만, 정작 소부장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때 반도체 강국이었던 일본이 다시 부활의 기회를 노리는 것 역시 든든한 소부장과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뿌리’인 셈이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이에 일본은 천천히, 단단한 준비를 이어온 것이다.
대만도 비슷하다. PC 부품 조립의 허브였던 대만은 어느새 인공지능(AI)과 정보기술(IT)의 중심 국가가 됐다. 그 배경엔 튼튼한 공급망과 반도체 수급 체계가 있다.
5월 대만 IT 박람회 ‘컴퓨텍스 2025’에서 만난 대만 반도체 기업 미디어텍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는 삼성도 있고 SK도 있지만 중소기업과 부품 생태계는 대만이 더 잘 갖춰져 있어요. 작은 회사들이 빠르게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이 크죠.”
우리나라는 그동안 대기업 주도의 고속 성장을 이뤄왔다.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글로벌 기업들을 키웠고 메모리 반도체 등 특정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점유율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태계의 중요성은 뒤로 밀려났다.
AIㆍITㆍ반도체 산업은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산업이 아니다. 제조부터 설계, 유통, 소프트웨어, 서비스까지 긴 사슬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세계 시장에서 버틸 수 있다.
기술력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기회를 주고, 실패를 견디게 해주는 환경이 있다면 성장은 가능하다. AI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 한국도 더 이상 ‘홀로 강한 산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재 하나, 부품 하나가 산업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