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거버넌스 투명성 높일 수 있어
섣부른 시행으로 개인정보 유출 우려
시스템 문제 따른 법적분쟁 늘수도
2026년 3월 판교 본사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진행하고 있는 한 중견 IT 기업의 회의장은 텅 비어 있다. 단상에 선 사회자만 카메라와 눈을 맞추며 연신 입을 열고 있다. 대신 수천 명의 주주는 집과 사무실에서 PC 앞에 앉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스트리밍 화면을 통해 주총에 참석했다. 사회자가 의안을 발표하자 ‘찬성’과 ‘반대’ 버튼이 동시에 눌린다. 단 10초 만에 수많은 의결권이 디지털 공간에서 행사돼 회사의 미래를 결정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투표와 회의 기록의 위변조 가능성을 제한한다.
전자주주총회 의무도입과 함께 블록체인, 스트리밍 기술이 바꿀 주주총회 풍경이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 제약이 사라지면서 누구든 쉽게 주주의 권리를 실시간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상법 개정안에 따른 전자주총 의무화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전자주총을 개최하는 경우 주주가 총회의 의사 진행과 결의에 실시간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기존 전자투표와 다른 점이다. 전자투표는 주총이 열리기 전 정해진 기간 전자시스템을 통해 미리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주총 당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데 제약이 있다. 개정안이 예고대로 시행되면 주주들의 온라인 실시간 참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소액주주들의 주총 참석이 활성화될 거란 기대감이 커진다.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정기주총 평균 참석률은 약 73.39% 수준(2020·2021년)이다. 3월 말로 주총이 집중되는 쏠림 현상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가운데 거리상 제약이 사라지면 개인 주주들이 총회에 참석해 실시간으로 목소리를 내기 쉬워질 전망이다. 특히 해외 투자자들의 주총 참석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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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사는 30대 투자자 A 씨는 “회사 위치와 관계없이 주총에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며 “개인 주주들의 발언권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전자주총을 전면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에서 우려도 적지 않다. 시스템 구축 부담 증가를 비롯해 익명성·비대면성 강화로 인한 보안 우려도 커진다. 최근 SKT, 예스24 등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도 이런 불안을 자극했다.
윤희상 법무법인 이을 변호사는 “당장 전자주총 시스템이나 플랫폼이 미비하고 향후에도 동시 또는 다중 접속에 의한 부하, 해킹에 대한 대응이 제대로 될지 미지수”라며 “실제 시스템 문제로 결의 효력에 대해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 대규모 소송이 불가피하다”라고 경고했다.
특히 주주들의 질의응답, 수정동의 등 대면 회의체라는 주총 본질을 온라인으로 구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윤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다수 주주의 질문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 응답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고, 기준 없이 질문권을 제약하는 경우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소송의 위험이 뒤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 변호사는 “전자주총은 주주권 행사의 저변을 넓히고 기업 거버넌스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지만 섣부른 제도 시행은 오히려 비용 부담과 각종 법적 분쟁을 크게 증가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도의 연착륙을 위해 유예 기간 동안 기업-주주들의 모의 테스트나 시범 사업의 선행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