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권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기존 금융서비스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주요 은행들은 관련 기술 실험과 해외 기관과의 제휴에 나서며 선제적으로 대응 중이지만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명확한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현장의 움직임과 제도 간 간극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테이블코인이란 다른 통화나 자산 대비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끔 설계된 디지털 화폐다. 달러 등 법정화폐에 연동된 형태가 대표적이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 등은 해외기관과의 제휴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국가 간 지급결제에 활용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일본 ‘팍스 프로젝트(Project Pax)’에 참여해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해외송금, 환전, 역외 지급결제 등 개선 효과 및 기술적 가능성을 점검하고 있다.
팍스 프로젝트는 한국의 페어스퀘어랩 및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일본의 프로그맷이 주관하는 국가 간 송금·결제 시스템 개선 테스트다. 현재 시중은행에서 해외로 송금을 하려면 1%대의 수수료를 내야 하고 약 1~3영업일 정도가 걸린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송금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고 수수료도 낮아진다. 중개기관인 금융사의 개입 없이 네트워크상의 검증과 승인을 거쳐 즉시 자금을 상대방에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운영·점검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365일 24시간 내내 이전·교환이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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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 관계자는 “현재 기초적인 실증 테스트를 진행 중”이라며 “비용 절감 수준, 처리시간 결제 안정성 등 관련 부분은 향후 진행될 2, 3차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농협은행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기존 금융시스템과 접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개선사항을 도출하는 것이 목표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디지털전략사업부 내 블록체인팀에서 스테이블코인 활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다른 은행과의 협업을 통해 공동으로 대응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은 앞서 2023년 증권토큰발행(STO), 커스터디, 스테이블코인 등 블록체인 기반의 비즈니스 대응을 위해 구성된 디지털자산팀이 관련 업무를 담당 중이다. 해당 팀은 현재 전방위적 비즈니스 모델 도출과 기술 기반의 가상자산서비스사업자(VASP)와의 협력에 집중하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 법제화 시 즉각적인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게끔 하기 위한 선제 작업이다.
하나은행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내외 금융시장 변화와 기술 트렌드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처럼 스테이블코인 거래 플랫폼 구축을 위한 내부 연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은행권은 오픈블록체인·DID협회, 금융결제원과 협업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공동 발행 관련 기술, 비즈니스 모델 공유 등의 연구도 하고 있다. KB국민·신한·우리·NH농협·IBK기업·수협은행 등이 참여 중이다.
이러한 은행권의 움직임과 달리 국내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제도화가 안 된 상태다. 금융위는 앞서 3월 스테이블코인, 사업자·거래규제 등을 아우르는 ‘가상자산 2단계 통합법’ 마련에 착수하며 스테이블코인 관련 논의를 시작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제도나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이뤄지고 이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은 관련 법을 통해 제도권으로 편입할 스테이블코인을 정의하고 사업자 요건과 이용자 보호 등을 규정했다.
이같은 제도화 흐름 속에서 달러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USD Coin(USDC)을 발행, 운영하는 Circle은 최근 국가 간 지급결제 인프라인 ‘CPN(Circle Payment Network)’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CPN은 금융기관이 자본이동 규제를 지키면서 스테이블코인으로 국가 간 지급결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블록체인 기반의 통신·결제 시스템이다. 개인, 기업 고객은 CPN에 가입한 금융기관을 통해 해외송금과 해외결제, 무역대금 결제 등을 실시간으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신상희 하나금융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이달 발행한 금융경영브리프에서 “환거래은행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국가 간 지급결제 절차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대체할 경우 송금 소요시간을 당일로 단축하고 비용 절감까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국내 금융기관도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기존 금융서비스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은행권의 노력이 제도로 뒷받침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스테이블 코인의 리스크와 정책 과제’ 보고서에서 “향후 국내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므로 정책적인 준비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국내 정책 설계에서는 법화자산 담보형 위주로 발행을 유도하도록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개별 스테이블코인의 사용 범위에 따라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차등 적용해 규제의 기술적 중립성과 금융안정 간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신 수석연구원은 또 다른 보고서 ‘일상으로 다가오는 스테이블코인’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금융안정, 통화정책, 자본유출 등에 대한 잠재적인 부작용을 방지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