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지역화폐는 우리 사회에 낯선 개념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페이’, ‘○○사랑상품권’ 등의 이름으로 발행돼 왔으며, 특히 코로나19 시기에는 국비 지원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에는 위축된 지역 상권을 떠받치는 긴급 처방으로 작용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소비 확대와 골목상권 회복 등 긍정적인 효과도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조적 한계도 드러났다. 소비의 지역 간 단순 이동, 지자체 간 경쟁적 할인에 따른 재정 소모,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계층에서도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는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다. 일시적인 소비 진작 효과는 가능하나, 그것이 지역 내 생산과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정책의 지속 가능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역화폐는 단순한 소비 유도 수단이 아니라, 지역의 경제 기반을 복원하고 자금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전략적 도구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가 지역 내 소득으로 이어지고, 다시 소비로 환류되는 선순환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구조 설계를 위해 다음 세 가지 방향이 중요하다.
첫째, 자금이 지역 안에서 머무르고 다시 흐르게 해야 한다. 지역화폐는 ‘어디에 썼는가’보다 ‘그 돈이 지역 안에서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중요하다. 단순히 소상공인의 매출이 증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수익이 다시 지역 내 소비, 고용, 투자로 이어져야 한다. 예컨대 소상공인이 받은 지역화폐로 지역 도매상, 재료 공급업체, 서비스업체에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면, 단일 화폐가 지역 내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순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의 소비나 B2B(기업 간 거래), 고용 지원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공공기관들은 지역 내에서 가장 규모 있는 소비자이며, 자금 흐름의 방향을 결정짓는 정책 주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화폐는 반복 사용을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이를 위해 사용처를 지나치게 제한하기보다는, 디지털 기반 시스템으로 전환해 실시간 소비 흐름을 분석하고 순환을 유도해야 한다. 지역화폐가 어느 계층, 어떤 업종에서 사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정책 개입의 정교함도 높아진다. 예컨대 순환이 정체된 업종에는 재사용 리워드나 공급자 인센티브를 부여해 다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영국 브리스톨의 지역화폐 ‘브리스톨 파운드’는 모바일 시스템을 도입했음에도, 지역 내 소비 생태계와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 채 운영 주체가 해산되었다. 기술만으로는 순환 구조를 만들 수 없다는 교훈이다.
셋째, 지역화폐는 일회성 포퓰리즘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특정 시기,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단기적 지급은 반복되면 정책 신뢰를 해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선거 직전 대규모 발행이나 과도한 할인율 적용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지역 내 자금 순환보다는 단기 소비 유도에 집중한 방식이며, 장기적으로는 지역화폐 제도 전반에 대한 회의감을 키우게 된다. 지역화폐는 재정과 소득을 동시에 설계하는 복합 정책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긴밀한 정책 공조와 예산 안정성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지역화폐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자금의 흐름을 설계하고, 사람과 기업, 공동체를 연결하는 지역경제의 인프라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를 지급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흐르느냐’다. 진정한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의 사람과 돈이 함께 살아 움직이는 순환 구조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