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눈치 보지 않고 만화를 즐길 수 있게 된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일간스포츠 한 부를 사들고 오곤 했다. 스포츠 소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전혀 아니었다. 주요 기사에는 별 관심 없이, 곧장 연재만화 코너로 넘어갔다. 그곳엔 친구들과 함께 박장대소할 웃음과 유쾌한 감탄을 선사하던, 고우영의 ‘삼국지’가 있었다. 이 만화는 신문 판매량을 끌어올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소설 ‘삼국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수많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또렷이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고우영의 ‘삼국지’는 고전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하되, 작가 특유의 해석과 풍자가 더해지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왔다. 고우영 특유의 스토리텔링은 정사와 야사, 만화적 상상이 절묘하게 섞여 독창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고우영 만화 속 유비는, 우리가 익히 아는 후덕한 이미지 대신, 귀가 엄청 크고 의뭉스러우며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 다혈질의 장비는 감정적인 결정에 휘둘리며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진중하지 못한 약점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멋진 긴 수염을 자랑하는 관우는 광활한 전장에서 적토마에 올라 단칼에 적들을 제압하는 전설적인 영웅 이미지다. 남성적 강인함과 권력욕 대신 중성적 외모와 성격을 지닌 제갈공명은 권력보다 백성과 나라의 안녕을 중시하는 정치가로 그려진다. 동탁, 여포, 조조, 손권, 하후돈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도 각기 다른 개성과 입체감을 지닌 존재로 살아난다. 고우영은 삼국지의 복잡한 정치사보다 인물의 감정선과 모험성을 부각시켜 독자들이 훨씬 더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미술대학을 다니던 우리들은 그의 그림 솜씨에 매번 감탄했다. 말을 타고 산굽이를 넘어 사라지는 장수의 실루엣, 욕망으로 일그러진 동탁의 표정을 보며 “이 선 쓴 거 봐. 데생이 장난이 아니네”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미 만화를 발표했지만,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었다.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난 둘째 형이 연재하던 만화를 이어받으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비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한 편의 만화를 완성하기 위해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의 사료까지 섭렵하며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고우영의 만화는 직설적인 언어와 19금 유머 등 금기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재치로, 독자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당시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서, 만화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된 ‘삼국지’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 많은 청년들에게 고우영의 만화는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일깨우는 자극제였다. 한국 만화사의 한 획을 그은 이 작품, 날카롭고 유쾌한 시선으로 또 한 번 우리의 감각을 흔들어 줄 고우영의 ‘삼국지’를 다시 꺼내 읽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