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리쇼어링(reshoring·해외 생산 기지의 국내 복귀)’정책이 현실과 괴리된 구호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경직된 노사 관계와 제한적인 세제 혜택 등으로는 해외로 눈을 돌린 기업들의 발길을 되돌리기에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여기에 최근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이탈은 더욱 가속화될 조짐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산업별로 실효성 있는 맞춤형 정책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17일 산업계와 학계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리쇼어링 정책을 “시대착오적이고 보여주기식”이라며 비판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10년 전부터 정부와 지자체가 리쇼어링 정책과 각종 지원책을 내놨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며 “지방정부의 세제 혜택도 기업 입장에선 규모가 작아 실효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노사 갈등과 경직된 노동문화가 기업 유턴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노조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기업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강조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국은 리쇼어링을 유도할 만큼의 차별화된 유인책이 부족하다”며 “원자재 수급이 어렵고, 인건비도 낮지 않아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기업 유치를 위해선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특혜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라고 덧붙였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도 “2013년 이후 각종 세제·입지·인건비 지원이 있었지만, 대부분 중소기업 중심이었고 효과도 제한적이었다”며 “해외 대비 높은 인건비와 규제 강도, 일회성 세금 감면, 낮은 정책 접근성 등이 리쇼어링을 가로막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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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리쇼어링 정책이 기업 규모와 산업군에 따라 정밀하게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태황 교수는 “국내에서 꼭 생산해야 할 산업에는 특별법 수준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며 “전 산업에 일괄적으로 혜택을 주는 방식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제 안보 측면에서 반드시 유치해야 할 산업에는 과감한 차별적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며 “핵심 기술은 국내에서 집중 육성하고, 가격 경쟁력이 중요한 품목은 해외 생산을 유도하는 양면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이러한 전략의 선례로 꼽힌다. 일본은 노동집약적 공정은 해외에 남기되, 첨단소재·부품 등 고부가가치 공정은 자국에 투자해 효율성을 높였다. 이 같은 전략 아래 2014년부터 본격적인 리쇼어링이 이뤄졌고, 2017년에는 해외에서 철수한 일본 기업 수가 725곳에 달했다.
우리나라 역시 반도체 산업처럼 국가 안보와 직결된 분야에서는 유연한 전략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글로벌 기업들에게 미국 내 생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핵심 기술은 국내에서, 단순 생산은 현지에서 분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미국과의 협력이라는 외교적 메시지를 주되, 핵심 기술은 반드시 국내에서 보유해야 한다”며 “AI 반도체 같은 첨단 분야는 무역 안보와 직결되므로 리쇼어링 전략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국내에 적극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 개선과 실질적 인센티브가 병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구체적으로는 △환경·노동 등 각종 규제의 일괄 처리 시스템 도입 △세제 감면의 지속성과 확대 △스마트팩토리 및 첨단 산업 클러스터 조성 △중소·중견기업 자금 지원을 위한 리쇼어링 전용 펀드 조성 등이 거론된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10년의 정책평가! 향후 10년의 혁신환경’을 주제로 개최한 온라인 좌담회에서도 기업들의 어려운 환경은 여실히 드러난다. 올해 전체 기업부담지수는 105.5로, 2015년(109.5) 대비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기준선(100)을 상회하고 있다. 기업들이 각종 의무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방증이다. 이날 발표에 나선 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장은 “법인세 최고세율이 2012년에 27%에서 2023년에 24%로 조정되는 등 세율과 과표구간에 변화가 있었고,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추세적으로 감소해 수익 기반의 법인세 부담이 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규제부담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크게 높아졌다. 정책평가연구원은 “52시간 근로시간 규제를 중심으로 고용유연성이 지극히 낮은 우리 노동시장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 국회를 중심으로 늘어난 규제법령에 대한 압박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면서 “규제네거티브시스템과 규제영향평가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10년전과 비교하면 조세 및 준조세 부담이 약간 줄었지만 규제와 규제행정에 대한 부담이 급증했다는 것이 우려되는 부분”이라며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규제입법에 대해 영향평가를 통해 합리적 대안을 찾고, 일선 지자체의 규제행태도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바꿔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글로벌 질서가 재편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국내 규제환경을 과감하게 바꿔 많은 기회요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지은 코딧 대표는 “한국은 플랫폼 비즈니스 환경이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며 “규제샌드박스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제약이 많고, 이를 대폭 확장해야 기업들이 움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혁우 배재대 교수도 “불확실성이 큰 시대일수록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줄이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며 “규제개혁을 국정 과제의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외국 기업 유치까지 고려한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황용식 교수는 “AI나 스마트팩토리 등 첨단 산업 역량이 탄탄한 데다, 고숙련 노동자가 풍부한 점은 한국의 강점”이라며 “이런 자원을 활용해 R&D센터, 고부가 산업 유치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대종 교수는 “한국은 인프라와 인재 경쟁력은 뛰어나지만, 강성 노조와 높은 법인세, 정책 불확실성이 걸림돌”이라며 “리쇼어링은 단순 복귀가 아니라 산업구조 재편과 외국 기업 유치까지 아우르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