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 늦게 진화한 곳이 먼저 늙는다

입력 2024-09-0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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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은 분해의 역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익숙한 표현이다. 총기를 청소할 때 먼저 덩어리로 나누고 각각의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 닦은 뒤 반대 순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들고 날 때 순서가 반대인 현상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도 만원이라 안에서 자리를 바꿀 수 없으면 늦게 탄 사람이 먼저 내려야 한다(자신이 내릴 층이 아니라도 내렸다 다시 타야 한다). 이런 현상을 아울러 ‘후입선출(後入先出)’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후입선출은 공간의 물체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구의 초기 생명체는 오늘날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원핵생물이었을 것이고 그 뒤 단세포 진핵생물, 다세포생물이 등장했다. 만일 지구가 가혹한 환경으로 바뀌어 대량 멸종이 시작되면 그 순서는 다세포생물, 단세포 진핵세포, 원핵생물이 될 것이다.

치매환자, 끝까지 남는 건 어린 시절 기억

흥미롭게도 기억 역시 후입선출의 패턴을 보인다. 얼핏 생각하면 최근의 일을 더 잘 기억할 것 같지만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특히 치매 같은 인지장애가 생기면 가까운 일들을 먼저 잊고 끝까지 남는 건 어린 시절 기억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사람의 뇌 가운데 늦게 진화한 부위가 가장 먼저 노화한다는 내용이다.

약 700만 년 전 공통조상에서 침팬지와 갈라져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은 인류는 약 200만 년 전부터 뇌가 급팽창해 지금은 침팬지 뇌 용량의 3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과정은 풍선을 불 때처럼 뇌의 모든 영역이 비례해서 3배로 늘어난 게 아니라 거의 차이가 없는 부위도 있고 5~6배 늘어난 부위도 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높은 인지능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두엽이 바로 급팽창한 영역이다.

독일 하인리히하이네대가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침팬지 189마리와 사람 304명의 뇌 자기공명영상 스캔 데이터를 분석했다. 원래 사람은 480명의 데이터가 있었지만 침팬지 데이터의 최고령이 50살이라 이에 해당하는 사람 나이인 58세가 넘는 데이터는 제외했다. 즉 중년까지 데이터를 비교해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뇌를 17개 영역으로 나눈 뒤 신경세포(뉴런)가 몰려 있는 회백질의 상대적인 부피 변화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의 뇌에서 급팽창한 영역인 안와전두피질의 회백질이 가장 빨리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두엽을 이루는 다른 부위인 중간전두피질, 내측전두피질의 회백질도 노화가 빨랐다. 반면 팽창 정도가 평균에 못 미치는 측두엽과 후두엽, 운동피질과 피질하 영역 등은 회백질이 줄어드는 정도가 덜했다. 이처럼 고등 인지능력에 관여하는 부분이 먼저 늙는 건 지나치게 사용해서이거나 급히 진화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취약성을 지닌 결과로 보인다.

▲뇌를 17개 영역으로 나눈 뒤 회백질이 줄어드는 상대적인 속도를 색으로 나타냈다(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갈수록 빨라짐). 사람은 고등 인지 영역인 전두엽, 특히 안와전두피질이 빨리 줄어들고 기본 생리 조절 영역인 중심부는 천천히 줄어듦을 알 수 있다(위). 반면 침팬지의 전두엽은 다른 부위와 별 차이가 없다(아래). 제공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뇌를 17개 영역으로 나눈 뒤 회백질이 줄어드는 상대적인 속도를 색으로 나타냈다(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갈수록 빨라짐). 사람은 고등 인지 영역인 전두엽, 특히 안와전두피질이 빨리 줄어들고 기본 생리 조절 영역인 중심부는 천천히 줄어듦을 알 수 있다(위). 반면 침팬지의 전두엽은 다른 부위와 별 차이가 없다(아래). 제공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노화와 알츠하이머병 관계 주목돼

이번 결과가 흥미로운 점은 인지력의 저하가 뚜렷이 드러나는 노인의 뇌는 포함하지 않고 중년까지의 노화 패턴을 분석했다는 데 있다. 즉 인류의 여정에서 뒤늦게 진화한 고등 인지 영역이 노화에 취약해 먼저 기능을 잃을 수 있고 그 결과 노년이 되면 인지력이 크게 떨어지며 알츠하이머병 같은 신경퇴행성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커진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뇌의 급팽창 영역은 조현병(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곳의 뇌 회로가 복잡하게 진화하면서 배선에 오류가 생길 위험성도 커졌고 그런 결과가 정신질환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이 시대와 장소에 차이 없이 1% 내외라는 사실도 이런 진화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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