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엑스포 유치실패, 정치가 유발했다

입력 2023-12-2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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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정부, 전경련·국정원 적폐로 몰아
경제단체 구심력 잃고 기업별 분투
정치가 망가뜨린 기업자산 복원해야

한국에서 재계가 국가적 사업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81년의 올림픽 유치활동이 효시가 될 것이다. 19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에 성공한 직후 당시 정주영 유치위원장(전경련 회장, 현 한국경제인협회)은 자신이 전경련 회장이 아니었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전경련의 민간경제협력 채널이 큰 힘이 됐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었는데 한·프랑스 경제협력위원회를 맡고 있던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빌어 아프리카 IOC 위원들의 표심을 얻어냈다고 했다. 또 스웨덴 업체들과 사업을 해 본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은 스웨덴 경제인연합회를 통해 스웨덴 IOC위원을 만나 서울올림픽 개최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엑스포 유치활동에서는 전경련이 보이지 않았다. 경제단체의 구심력 없이 기업들만 뛰었으니 그 효과가 제한됐을 것이다. 가령 일본에서 게이단렌(經團連)의 지원을 받아 그 나라 정부를 접촉하는 경우와 기업 단독으로 접촉하는 경우는 그 효과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전경련을 적폐로 몰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몰아넣은 전 정권의 오판이 오랜 기간 다져온 민간경제협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것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으나 필요할 때면 나타나 힘이 되어주는 그런 존재가 경제단체다.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할 때 BIAC(OECD 회원국 민간경제단체 협의회)이 그랬고 G20와 함께 B20(20개 선진국의 경제인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할 때도 경제단체들이 큰 힘이 돼줬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그런 근시안적인 행태로는 친구가 생길 수 없다.

정주영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과정을 설명하면서 안기부(현 국정원)의 도움도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정 회장의 올림픽 유치에는 국내에서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

무엇보다 큰 저항은 체육계였다. 당시 우리나라 IOC 위원은 IOC 총회가 열리는 독일의 바덴바덴에 일부러 늦게 들어왔다. 우리 경제계 인사들이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 다니고 있는데 그는 유유자적이었다. 나중에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같은 IOC 위원인데 되지도 않을 부탁을 하면 체면이 깎인다는 것이 그가 바덴바덴에 늦게 온 이유였다.

또 하나의 안티 세력은 관료였다. 주최도시 서울에서는 홍보영상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역시 되지도 않을 일에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 할 수 없이 절반을 현대가 내고 절반은 서울시가 대기로 했는데 이마저도 불발이 됐다. 기업만 통째로 뒤집어썼다. 거기다 학자 출신인 당시 국무총리도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반대했다.

정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었다지만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다고 하니 흉내는 내겠지만 돈은 안 쓰고 생색만 내려는 기업들도 많았다. 정 회장이 얘기한 안기부의 도움은 아마도 이런 국내적 저항을 막아준 것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막강한 대외 정보력을 발휘해 중간중간 승패를 객관적으로 예측해 될 곳에 집중했던 것도 안기부만의 능력이었고 정 회장은 이를 높이 샀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국정원도 전경련같이 전 정권에서 적폐 취급을 당했다. 정보기관에서 정보 활동이 마비되니 할 수 있는 것은 자리다툼뿐, 따라서 국가적 행사의 유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의 참사는, 우리 내부의 잘못이 더 크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무너진 탓이다. 남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가 망가뜨렸다. 국정원의 정보력과 전경련의 실행력이 부재하면서 우리는 허황한 꿈을 꿨고 막바지까지 국민은 우롱당했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는 기업을 가르치려만 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유치에 성공하자 정부는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줬다. 정주영 회장에 따르면 유치에 반대했던 장관들까지 훈장을 받았는데 기업인들은 자기 말고 아무도 받지 못했다고 서운해했다. 2007년 평창이 소치에 발목 잡혀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가 불발되자 당시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정부에서 특별사면까지 하면서 기업 총수들을 지원해 주었는데 이들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런 정치㎡를 가지고는 이제 우리는 다시 올림픽 같은 국가적 사업을 유치할 수 없다. 기업도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정치의 들러리로 설 필요는 없다. ‘구이경지’(久而敬之·오랫동안 서로 공경한다), 이번 엑스포 유치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절박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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