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놀이터] SF를 현실로 만들자 노벨상이 왔다

입력 2022-10-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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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내가 조국 스웨덴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비밀 취미로 시작했던 연구가 30년 만에 과학소설 같은 프로젝트에서 결실을 맺었다. - 스반테 페보

1993년 개봉한 영화 ‘쥬라기 공원’은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적인 SF영화로 남아 있다. 나무 수지가 굳어 만들어진 보석인 호박에 갇힌 모기 몸속에 들어 있는 공룡의 피에서 세포핵을 얻어 체세포복제로 공룡을 탄생시킨다는 설정도 기발했고 컴퓨터그래픽임을 잊을 정도로 사실적인 공룡의 움직임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영화의 설정은 여전히 실현 가능성이 없다. 1억 년 전 DNA는 완전히 파괴돼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쥬라기 공원’이 상영될 무렵 과학자들은 한창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무려 30억 염기나 되는 DNA 가닥을 해독한다는 건 엄청난 과제였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더 이상 SF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3만 년 전 멸종한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을 해독한다는 건 다른 얘기였다. 공룡 게놈보다는 상태가 낫겠지만, 그 사이 DNA가 대부분 파괴되고 남은 것도 끊어져 조각조각 난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역시 SF에서나 가능한 설정이었다.

그런데 2000년 인간(현생인류) 게놈이 해독되고 불과 10년이 지난 2010년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이 해독됐고, 같은 해 시베리아의 한 동굴에서 발굴한 4만 년 전 인류의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를 해독해 데니소바인이라는 미지의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알고 보니 게놈의 손상이 정보를 잃어버릴 정도로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고인류 게놈해독이라는 SF 설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들의 게놈을 비교한 결과 놀랍게도 오늘날 아시아인과 유럽인에는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아시아인에는 여기에 더해 데니소바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한국인 게놈에서 네안데르탈인의 기여도는 약 2%, 데니소바인은 약 0.2%다.

이 두 발견을 이끈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 스반테 페보 소장은 12년이 지난 올해 이 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수상자 발표 주간을 앞두고 분야별 예상 수상자들이 거론되는데, 올해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아무도 못 맞춘 것 같다. 그럼에도 막상 발표되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축하해 주고 있다. 나 역시 ‘그동안 왜 이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지’라고 오히려 의아해할 정도다.

▲스테판 페보가 이끄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는 2010년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게놈을 해독해 현생인류와의 관계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의 공통 조상과 현생인류는 약 80만 년 전 갈라졌고, 그 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갈라졌다. 약 7만 년 전 현생인류가 유라시아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이들과 만나 피가 섞이기도 했지만, 결국 두 인류는 약 3만 년 전 멸종했다. (제공 노벨재단)
▲스테판 페보가 이끄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는 2010년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게놈을 해독해 현생인류와의 관계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의 공통 조상과 현생인류는 약 80만 년 전 갈라졌고, 그 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갈라졌다. 약 7만 년 전 현생인류가 유라시아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이들과 만나 피가 섞이기도 했지만, 결국 두 인류는 약 3만 년 전 멸종했다. (제공 노벨재단)

수상 업적도 대단하지만 수상자인 페보 소장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페보의 아버지는 198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생화학자 수네 베리스트룀이다. 부자가 노벨상을 받은 건 이번이 일곱 번째라고 한다. 그런데 부자의 성이 다르다. 베리스트룀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살다 2004년 사망했다. 페보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어머니 카린 페보의 성을 따랐다. 여담이지만 페보가 태어난 1955년 베리스트룀의 또 다른 애인도 아이를 낳아 동갑인 배다른 형제가 있다.

웁살라대 의대에 들어간 페보는 의사와 학자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를 택해 분자생물학을 연구했다. 어릴 때부터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심이 많았던 페보는 문득 ‘미라에서도 DNA를 추출해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런 연구가 없자 자신이 해보기로 결심했다.

1983년 안면 있는 이집트학 학자의 도움으로 베를린국립미술관에 소장된 2400년 전 미라에서 근육 시료를 소량 얻은 페보는 DNA를 추출해 염기서열 일부를 해독한 결과를 1985년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당시 지도교수는 제자가 몰래 한 취미 실험에 화를 내기는커녕 단독 저자로 논문을 내게 해 제자를 띄워줬다.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최신 게놈해독기술을 배운 페보는 1990년 독일 뮌헨대에 자리를 잡고 매머드 같은 멸종동물의 미토콘드리아 게놈분석 연구를 진행했다. 세포호흡을 맡는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는 별도의 작은 게놈을 지니고 있다. 1991년 알프스에서 발견된 5300년 전 남성 ‘외치’의 DNA 분석을 의뢰받은 페보는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해 외치가 오늘날 유럽인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제 페보의 관심은 이집트 미라보다 열 배 이상 오래된 네안데르탈인으로 넘어갔다. 1996년 독일 본박물관에서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뼈 화석 시료를 받은 페보는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1997년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해독했다. 이듬해 새로 설립한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페보는 네안데르탈인의 세포핵 게놈을 분석한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10년이 넘는 노력 끝에 성공했다. 세포핵 게놈은 30억 개 염기로 불과 1만6500여 개의 염기인 미토콘드리아 게놈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게놈해독은 이들이 왜 현생인류에 밀려 멸종했는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있다. 이들과 현생인류에서 차이가 나는 유전자 가운데 다수가 뇌의 발생에 관여해 인지력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의대생 페보가 임상의의 길을 택했다면 아직까지도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은 해독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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