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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각] 우리가 철학에서 배울 것들

입력 2020-11-25 18:07

시인, 인문학 저술가

스무 살 무렵 피의 본성인 듯 시와 철학에 이끌렸다. 무지몽매와 혼돈으로 허우적이던 나! 순진무구했던 나는 철학책에서 필요한 것을, 무엇보다도 젊음의 약동하는 피를 수혈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그랬으니 틈만 나면 헌책방을 순례하며 시집과 철학 책을 구해다 읽고,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늘 먼 곳을 동경하며 하염없이 책읽기에 빠져들었다. 철학은 왜 중요할까?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생각하는 존재, 의미의 존재, 오성의 존재로 다시 살게 한다. 삶이 생각, 의미, 오성에 의해 이끌릴 때 무지와 소외와 광기에 매몰된 존재에서 벗어나는 계기적 찰나와 마주친다. 지금까지 철학자는 세계의 해석자이자 발견자,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혁신가다. 생각함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활공하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 나는 철학을 향한 관심과 지속적인 독서가 영향을 끼치고, 삶의 어떤 부분을 긍정적으로 바꾼다고 믿는다.

시와 철학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다. 가장 좋은 시인은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고, 가장 좋은 철학자는 가장 훌륭한 시인이다. 둘은 오성(悟性)을 향하는 길에서 방법론적 차이를 가질 뿐 한 혈통이다. 시는 ‘상상력’을, 철학은 ‘사유’를 방법론적 매개로 삼는다. 시는 자명함을 배제함으로써 자명함에 닿고, 철학은 의미를 배제함으로써 의미에 닿는다. 철학자는 생각이라는 섬광에 기대어 세계와 존재를 직관한다. 철학자는 머리를 짜내서 ‘정리(定理)’를 세우고, ‘명제’를 제시하고, ‘정리’와 ‘명제’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철학은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을 접목키고, 그 내부로 삼투하며, 상호적으로 융합하는 사유의 방식! 철학은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에서 바글거리며 발현된다. 철학은 자명한 것, 즉 상식, 대화, 지혜 너머로 나아가려는 사유의 도약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빛을 내는 행위이고, 논쟁술이 아니라 사유의 약동이고 도약술이다. 이때 사유의 내용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유의 내용이란 늘 사유의 형식 자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오로지 생각함에서 치르는 사유의 전쟁이고 도약이다.

내 인생 최초의 철학책으로 꼽을 수 있는 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삶이라는 야전(野戰)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병사이자, 적진을 정찰하고 탐색하는 척후병이었던 철학자 니체는 철학과 전쟁을 동일시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전쟁을 “거룩한 과업”이라고 말하는데, 그 전쟁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내적 사유의 전쟁, 도처에 숨은 적들과의 전쟁, 거짓이나 우상과의 전쟁이다. 그는 자신을 망치를 들고 우상을 깨는 철학자라고 소개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생”을 사랑하는 철학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전투다.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너희들이 하는 노동이 전투가 되고 너희들이 누리는 평화가 승리가 되기를 바란다.” 니체는 훌륭한 명분이 전쟁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전쟁이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만들 것이라고, 더 나아가 자기 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기꺼이 전사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철학은 벼락처럼 내 뇌에 꽂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태하게 살아왔는가!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전쟁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말하면서 전쟁을 피해 도망을 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자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갈망하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나는 여러 번 탄식을 했다. 니체의 책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인식욕을 채워주는 한편 내 절박한 내적 필요에 응답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니체와의 만남은 운명이 된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20대 때 나는 광대의 역할을 떨치고 일어나 사자의 심장을 갖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일에 대한 열정으로 사업을 일구고, 가정을 꾸려 건사하며 자식을 낳아 길렀다. 물론 그건 작은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늘 침울하고 자신감이 없던 청년이 나약함을 떨치고 일어나 세상과 부딪치면서 도약한 데는 니체 철학의 좋은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가 없다. 니체는 평생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끊임없이 떠돌았다. 니체는 고산 지대와 호수, 그리고 지중해를 좋아했다. 그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장소의 철학이자 기후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니체는 자기를 “방랑하는 자이자 산을 오르는 자”라고 규정한다. 니체는 “나는 너의 미로다”라고 말한다. 나는 철학의 미로를 헤매었다. 니체 철학의 정수를 정신없이 들이키며 철학이 건네주는 황홀과 도취 속에서 부정의 정신에서 긍정의 정신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어느 순간 삶의 얽힌 매듭들이 주르륵 풀렸다. 나는 더는 삶을 버거워하며 우울감에 빠지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우리는 지구라는 낯선 별에 온 이방인들이다. 이방인이라고? 그렇다. 본디 여기 태생이 아니라 저기 먼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 이방인은 이곳과 저곳의 ‘사이’에 존재한다. 이방인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사이’를 실존의 감각으로 체화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방인은 안에 있는 동시에 밖에 있다. 그러니까 중간에, 문턱에 있는 것이다.”(니콜 라피에르) 아무 소속이 없이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이 미궁 속을 헤매는” 자들. 그들은 자주 길을 잃으며 지리를 낯설어하며 어리둥절한다. 불가피하게 주변인, 디아스포라, 망명자로 살 운명을 받은 이방인에게 이 세계는 온통 낯선 것 투성이다. 환경의 낯섦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다. 그들이 낯선 세상을 살기 위해 붓다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 나는 우연히도 니체라는 서양의 붓다를 만났다. 유럽의 가장 독립적인 정신이던 니체는 자기를 “유럽의 붓다”라고 했다. 니체는 붓다의 불성(佛性)을 선험으로 이해하고 제 안에 체화시킨 철학자다.

한 번 존재한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있는 삶은 또다시 되풀이하며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철학과 붓다의 만물이 윤회한다는 사상은 닮았다. 존재의 끝과 시작은 하나의 원처럼 맞물려 있다. 시작되는 것은 언젠가 끝나지만, 그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나 자신이 영원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라고,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하나의 긍정으로 받아들였지만 붓다는 윤회를 괴로움으로 이해했다. 붓다는 수행의 결과로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차이를 드러내지만 붓다와 니체의 사상은 닮았다.

거듭 말하지만, 환자이자 의사이고, 붓다이자 명민한 제자인 니체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웃는 법, 춤추는 법,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고향을 떠나 사는 법, 고독을 견디는 법, 병(病)이라는 불안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지 않는 법, 낙타처럼 순응하는 인간이 되지 않고 사자처럼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놀이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기쁨을 얻는 법을 배웠다. 철학은 우리 안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고 가장 높은 사유로 솟아오르게 하는 촉매다. “사람은 그의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분기한다.” 이제 철학이 한 인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 철학자의 사유가 내 삶과 사유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써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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