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고향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0-10-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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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북녘 하늘에 기러기 떼 지어 나니 겨울이 가까워 옴을 알겠다. 대기의 찬 공기에 반응하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다. 화사한 국화 꽃잎은 시들고, 모과는 심심함을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지상으로 낙하하고, 뱀들은 동면을 하러 땅속으로 숨어들 때다. 이런 환절기엔 마음이 허전하고 시리고 삭신 여기저기가 공연히 쑤신다. 이맘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는데, 이수인이 작곡한 ‘고향의 노래’다. 언제 이 아름다운 노래가 내 마음에 둥지를 틀었을까.

“국화꽃 져 버린 겨울 뜨락에/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고향길 눈 속에 선 꽃 등불이 타겠네//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산골짝 깊은 골 초가 마을에/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고향의 노래’, 1968)

슬픔 속 찬연한 기쁨이 오롯하게 피어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해진다. 타향살이에 이골이 난 사람에게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가는 곳, 객지를 떠돌다가 기어코 돌아가야 할 곳이 고향이라고 일러준다. 고향은 산골짝 초가 마을이거나, 양지바른 장독대의 항아리에서 장맛이 깊어가는 동네다. 누군가 작은 교회당에서 종일 풍금을 치고, 겨울이 오면 싸리울에 함박눈이 쌓이는 곳이다. 고향은 뻐꾸기 울음, 은하수, 반딧불이, 추수가 끝난 빈 들, 빈 들의 눈보라, 강과 강가에 버드나무가 서 있는 조촐한 풍경이다. 고향은 어머니, 가난, 빚, 진달래, 소나무, 저녁밥 짓는 부엌 아궁이, 굶은 채 잠든 저녁의 자리다.

고향은 정체되어 있는 탓에 답답하다. 고향을 박차고 떠나는 것은 청년들이다. 하지만 탈주 욕망을 부추긴 더 좋은 사회적 기회를 거머쥐려는 기대는 좌절되기 일쑤다. 고향은 덧없이 사라진 과거, 그 부재가 빚는 그리움 속에서 기억의 왜곡을 낳는 원체험이다. 고향-찾기는 존재의 근원, 즉 피안으로의 안착이지만 고향을 가리키는 지리적 장소는 남을지언정 마음에 품은 무릉도원은 사라지고 없다. 동경의 땅, 마음 속 유토피아로만 남은 고향은 노스탤지어를 낳는다. 노스탤지어는 1678년 스위스의 의학도 요하네스 호퍼가 장소 애착의 욕구가 좌절된 사람이 겪는 우울증, 불면증, 의욕 상실, 식욕 감퇴와 같은 증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다니엘 레티히는 ‘추억에 관한 모든 것’에서 노스탤지어를 “두려움과 불안, 방향 상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말한다. 욕구 불만의 누적이 낳은 달콤하고 쓰라린 이 마음의 병은 상실의 징후이자 과거 기억을 아름답게 윤색해서 삶의 고달픔을 견디게 하는 정신의 한 치유책이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고향은 선조들의 오래된 땅이고, 태어나고 자란 풍경, 원초적 입맛과 취향을 빚는 장소다. 그것은 “깊숙하고도 고요한 애착의 장소”(이-푸 투안), 참된 삶의 바탕이고, 지각적 통합성을 만들며, 정서의 중심을 관통하는 근원이다. 어린아이는 자라는 동안 은신처, 놀이와 모험의 자리, 새 둥지 등을 찾아내며 고향의 명민한 지리학자로 길러진다. 도시가 끊임없이 철거와 파손, 지역의 새로운 배열과 분할이 일어나는 중립 공간이라면 고향은 영속성을 품은 생명체와 같은 유기체적 장소다. 고향이 자연과 주체의 상호교섭 속에서 장소 경험을 심화시키며 민담, 전설, 신화를 낳는 장소인 데 반해 도시는 인위적인 경관들로 구축된 유동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삶의 축적된 경험들, 즉 상상, 감성, 기억들의 투사로 만들어진 장소성을 지우며 무장소화(placelessness)를 지향한다. 아울러 그 부조리함으로 장소에 거주하며 빚는 실존의 질서와 의미화를 일그러뜨린다. 사회학자 전광식은 ‘고향’이란 저서에서 “고향은 존재의 추상화를 배격한다”라고 말한다. 고향은 개별적 실존의 생생함을 부여하지만 도시는 개별자를 원자 단위로 쪼개고 헐벗은 익명성 속에 가둔다는 뜻이다. 고향 말은 시골의 옛말, 표준어의 구박을 받는 토박이말이고 사투리인데, 에밀 시오랑에 따르면 그것은 “햇살과 진흙이 묻어 있고, 생기와 부패의 냄새가 배어 있는 모국어”다. 고향 말은 모성의 언어, 관용과 화해의 언어다. 그에 반해 도시 말은 제 잇속이 먼저인 거래의 말들, 교활한 투기의 언어, 사람을 소외시키는 상업과 무역의 언어다.

고향은 영혼이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또한 장소 정체성과 심미적 이성을 주조하기에 실존의 근거이자 그 심연이다. 고향의 제일의적 조건은 보상 없이 주체에 주어지는 증여와 환대다. 우리가 고향 회귀를 꿈꾸는 이유는 분명하다. 회색빛 도시는 고향의 죽음, 고향의 무덤이다. 도시는 거짓과 기망, 수량과 금리, 약육강식과 배신, 이해타산에 따른 합종연횡(合縱連橫), 목적지향적 관계로 엮이는 곳이다. 길 잃은 자와 무위도식하는 자들, 자기 착취로 소진된 자들, 언행이 얄망궂고 되바라진 이들, 삐끼와 여리꾼, 사기꾼과 모리배가 날뛰는 곳이 도시다. 도시에 태어난 자에게 고향은 영영 허락되지 않는 사치다.

20세기 한반도인은 거스를 수 없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흐름 속에서 불가피하게 고향 상실자로 살았다. 많은 이들이 외세의 피침과 전쟁 피란, 산업화-도시화가 부추긴 대규모 탈농과 도시 이주의 대유행, 근대 이후 커진 유동성 속에서 고향에서 뿌리 뽑힌 채 떠밀려 나왔다. 여름이면 옥수를 찌고, 초겨울 저녁엔 배춧국 끓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밥벌이에 바쁘다. 시인 정지용은 이렇게 노래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고향’) 변한 건 고향이 아니라 타향을 떠돌다가 돌아온 내 마음이다. 어쨌든 고향에 돌아와도 산꿩이 알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우는 고향은 없으니, 고향 상실의 낙담과 피로감은 오로지 고향을 떠난 자의 숙명이다.

고향을 잃은 자는 바깥으로 내쳐진 자,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이다. 고향을 떠난 자는 실향민의 운명을 수납할 수밖에 없다. 실향민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실존 기획은 귀향 서사의 완성이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귀환하려고 스무 해를 헤매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이는 모든 귀향 서사의 원형이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하지만 그것은 가망 없는 꿈, 존재의 허망한 몸짓이다. 왜 그토록 고향 회귀가 힘들까? 그것은 고향 회귀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나아가는 시간 여행인 까닭이다. 시간은 바람 같은 지나감이고 파도 같은 찰나의 일어남이다. 고향은 지나가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퇴적한 실존 사건이다. 고향 회귀는 실패가 예정된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시간 여행, 사라진 저 너머로의 불가능한 시간 여행인 것이다.

그대 아직 고향을 꿈꾸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탯자리, 유년의 낙원, 존재의 시원(始原), 영혼의 원적지(原籍地)를 잃은 채 창백한 고향 상실자로 떠돌았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일 때 그 안복과 감격을 누린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왜 끝끝내 그 안복과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까? 실향민은 느림, 관계의 결속, 자아의 중심을 꿰뚫는 의미를 잃는다. 그들은 참된 삶의 바탕에서 밀려나 내면이 늘 헐벗고 주린 업둥이의 삶을 산다. 이젠 영화(榮華)도 보옥(寶玉)도 다 싫소, 낙향해서 연못에 수련을 심고, 뽕나무 밭이나 일구며 살겠소! 타향살이에 시난고난 하며 고향 바라기를 하다가 겨우 돌아왔건만,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오, 그래서 행복은 저 멀리 있고, 나는 늘 불행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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