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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도의 세상 이야기] 협상의 진실

입력 2020-10-27 17:47

서울대 객원교수,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얼마 전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밥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rage)’에서 미국과 북한의 핵협상의 일단이 소개되었다. 딜(deal)의 달인이라는 트럼프 대통령과 늘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왔던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 체제하에서 어떤 모습으로 협상에 임했을지 궁금한 부분이 많았는데 상당 부분 세상에 알려진 것 같다.

일반적으로 협상은 실무진이 참여하여 협상의 목표와 방법의 골격을 정하는 소위 ‘모달리티’에 합의한 후 책임자의 추인을 받은 다음에 세부적인 협의를 통해 협상 문안을 만들어 최종 타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번은 구체적인 협상의 얼개가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가 만나 담판을 짓는 방식으로 진행됨에 따라 결과에 대한 예단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동안 양측의 불신이 워낙 컸으며 북한은 핵포기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협상에 임하기 때문에 실무진으로는 협상 진전에 한계가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1차 핵협상인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이행 실패로 끝나 결과적으로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 점을 고려하면 소위 실무진의 ‘주고받기’식 협상이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장에서 쓰이는 용어는 일상 생활에 통용되는 뜻보다는 훨씬 중의적 의미를 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 협상가들은 합의 결과가 안 나오더라도 매우 절제된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협상 후 상당히 과격한 용어가 나온다면 협상장의 분위기는 그보다 훨씬 험악했을 수 있다. 2019년 하노이에서 개최된 제2차 미북 간 정상회담 후 북한의 반응을 보면 당시 협상 결과가 북한의 입장에서 사전에 예측한 것과 매우 다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협상이 끝난 후 협상단이 ‘매우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있었다’고 발표하면 우리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협상에 익숙한 전문가들은 때때로 이 표현을 양측이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하여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또는 합의안이 나오고 협상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내용이 ‘양측이 만족할 만한 매우 균형적인 것’이라 할 때도 전문가들의 평가가 그리 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협상안이 순조롭게 마련되었다면 그 결과가 실질적인 진전이 그다지 없는 낮은 단계의 합의이거나 실천이 어려운 내용일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 핵협상 전인 1994년에 북한의 핵동결과 이를 대가로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주기로 약속했던 1차 합의도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협상 결과가 상호간에 ‘주고받기’식으로 잘 문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특히, 협상 후 일각에서 북한의 핵포기라는 어음을 대가로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연료유 공급이란 현금을 주었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면서 어려움이 예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협상 용어는 핵협상과 같은 정치외교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통상협상이 일상인 제네바의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일어난다. 2001년 미국 뉴욕의 트윈타워와 워싱턴의 국방부가 알 카에다로부터 테러를 당한 후 세계경제 회복을 위해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관심인 관세와 보조금 철폐를 통한 시장 개방에 중점을 두었던 종전의 협상 틀이 이번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해를 모두 반영하여 후진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지원 내용까지 포괄한 협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 달리 협상은 양측의 대립으로 오랫동안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협상의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WTO 사무총장에 유럽연합의 통상 대표였던 파스칼 라미라는 거물을 선임하고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총장에 취임한 후 지금까지 전문가 중심의 협상 관행을 비판하고 협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그러면서 제네바 협상장에서 쓰이는 ‘협상 전문용어(jargon)’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다자협상은 워낙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얽혀 협상에서 합의를 이루려면 성과가 낮아지게 되며, 협상의 진척 속도도 매우 느려 소위 점진주의(incrementalism)가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에 참여한 대표들은 협상이 끝나면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으며, 협상 결과가 잘 균형 잡혀 있다’고 발표하곤 했다. 이러한 관행을 해소하고자 협상이 재개된 후 미국, 유럽, 인도, 브라질로 구성된 소위 ‘빅 포(Big Four)’ 중심으로 본인이 직접 협상을 주도하며 타결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협상 결과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결국 최종 타결에 실패하였다.

협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그 성과물이 만족스럽게 나오기 위해서는 협상 목표에 대해 양측 간의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서, 실무적 협의를 통해 실천 가능한 방법과 불이행 시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잘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협상이 끝나자마자 바로 해석의 차이가 나오며 신뢰가 무너져 실패한 합의로 끝나기 쉽다. 그런 이유로 협상가들은 협상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나쁜 합의는 합의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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