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별자리 사라진 밤하늘 아래서

입력 2020-05-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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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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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전염병의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일상은 정처 없이 표류하는 중입니다. 재난(disaster)이란 부서진 문 앞에서 열쇠를 들고 서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요. 어원을 찾아보니, 재난은 ‘멀리’ 혹은 ‘없는’이란 뜻의 라틴어 ‘dis’와 별을 뜻하는 ‘saster’란 두 단어가 합성한 것이라네요. 이 단어를 뜯어보면 재난이란 ‘별이 없는 밤’이라는 뜻이지요. 길 찾는 나그네에게 나침반 같은 그 무엇이 ‘멀어졌거나’ 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그게 재난의 본질인 거지요. 별자리를 보며 갈 길을 가늠하던 옛날의 나그네에게 별 없는 밤이란 난데없는 난감함이겠지요. 그러니까 재난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는 별자리 없는 밤의 나그네와 같은 처지이겠네요. 별 없는 밤하늘 아래 외딴 곳에서 영혼이 불안에 잠식당한 채 이 재난의 시대에 우리는 내팽개쳐진 것이지요. 어린 시절의 성가대와 동네마다 그 많던 한량들, 이웃과 정을 나누던 골목이나 친목계는 다 사라졌어요. 이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나 낙원에의 꿈은 한 점의 가망도 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겠지요.

여러 형태의 재난이 겹치는 가운데 세계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삶은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자본주의가 퍼뜨리는 탐욕, 투기자본의 파렴치함, 편파적인 진리의 뻔뻔함들, 정치적 올바름을 대체한 완고한 진영 논리, 이런 진부한 악들이 내뿜는 독소가 세계의 낭랑한 완전함을 갉아먹고, 우리의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앗아갔지요. 재난이 상습화된 세계에서 불안이 삶의 상수(常數)가 되는 건 불가피한 사태겠지요. 불안에 덜미 잡힌 생이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삶을 집어삼키도록 놔둬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그 해법을 모르지요. 산소가 희박한 탄광 속에서 날카롭게 울음소리를 내지르는 카나리아 같이 우리는 불안의 검은 그림자 속에서 작은 분별성과 소심함을 품은 짐승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지도 모르지요. 당장 무감각과 무기력 속에서 죽어가는 삶을 위한 심폐소생술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이 생명을 어떻게 회생시킬 구원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헛것을 보며, 헛것들이 춤추는 환영의 세계를 건너온 게 아니지요. 우리는 노동으로 쌓은 기쁨과 보람을 섬기고, 아이를 두셋씩 낳아 기르며 살림을 꾸리며 법과 관습의 울타리 안에서 이웃들과 온정을 나누며 살았지요. T.S. 엘리엇은 이렇게 노래했지요. “그대와 나를 위한 시간이 있겠지./아직 백 번은 망설일 시간이,/백 번은 바라보고 백 번은 수정할 시간이 있겠지,/토스트를 먹고 차를 마시기 전까지는.”(‘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 제 궤도를 도는 완전한 행성들과 제 구실에 충실한 날씨들 속에서 문명은 번성을 누리고, 그 시절엔 우리에게도 백 번은 망설일 시간이 충분했지요. 달마다 월급봉투를 받아오는 지아비와 아이를 잘 건사하는 지어미가 함께 꾸리는 가정들이 건재할 때 아직 우리에겐 가망이 있었지요. 서로에 대한 혐오와 의혹은 작고 우애와 신뢰는 컸던 그 시절엔 우리 삶을 고쳐 쓸 기회는 열려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창공을 활강하는 의기양양한 새들과 땅 위에 녹색 날개를 펼친 명랑한 수목들이 무성하건만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탕진한 채 지금 여기 재난의 한가운데 불시착했지요.

옛날의 가난 속에서 젖과 꿀을 나누던 우리는 정말 우리였을까요? 우리는 변하고 변한 것은 과거의 것과 동일할 수가 없지요. 쏟아버린 커피에 젖은 책은 예전의 그 책이 아니듯이 말이지요. 아, 옛날의 우리는 절멸했어요. 파블로 네루다는 “우리였던 건, 우리가 아니다”라고 썼지요. “그들은 변하고, 입은 변한다./같은 입은 지금은 다른 입이다./그것들은 변한다, 입술, 피부, 혈액순환,/다른 영혼이 우리의 골격을 차지했다,/언젠가 우리 속에 있던 것이 지금은 없다.”(‘과거’) 재난은 인류의 빛나는 꿈을 짓밟고 우리를 불능과 불가능 속에 빠뜨리지요. 나날의 삶에서 감당하는 기후변화, 전염병, 지진, 전쟁과 테러 같은 재난은 우리를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 데려가지요. 과거의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변하듯이 세계도 변합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다양한 빛과 경이로 감싸인 세계는 이미 끝났고, 다시는 그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날씨와 계절, 달과 채무(債務)는 여전하고, 이슬 머금은 채 피어난 장미꽃 봉오리는 시들어 떨어지며, 먼 바다에서 푸른 물이랑은 쉬지 않고 해안으로 달려들고, 해무(海霧)가 자욱한 바다 위로 여객선은 파도를 가르며 항해하지요. 향이 좋은 커피를 파는 카페들은 문을 열고, 시장 상인들은 오늘도 가게 문을 열고 웃으며 빵과 구두를, 면양말과 속옷을 팔겠지요. 코미디언들은 우스꽝스런 연기를 하고, 방짜유기 장인(匠人)들은 철과 모루를 다루며 그릇이나 징을 만들지요. 산부인과에서 아기들은 태어나고, 장의사들은 죽은 이의 사체를 관에 넣는 동안 산 자들은 만나서 유황오리를 먹으러 식당엘 가고, 누군가는 죽도록 사랑하다가 헤어지며, 힘줄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현존의 크고 작은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요. 한밤중 홀로 잠 깨어 메마른 불면의 고통을 겪는 이는 아마도 우리 삶에서 가장 사소한 불행의 찰나를 견디겠지요. 거대한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건만 그 세계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쓰라린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 진실과 똑바로 마주보고 서야 합니다.

별자리를 보면서 나그네들이 가려던 곳은 어디일까요? 그리고 오래된 별자리들이 다시 돌아와 밤하늘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옛날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4원소, 공기·흙·물·불이었지만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그 네 가지에 돈을 덧붙여 5원소라고 말합니다. 5원소의 세계로 바뀌면서 물의 깨끗함과 초원의 빛, 누구나의 마음에 있던 겸손과 소박한 도덕률, 음악의 기쁨 따위는 사라졌지요. 옛날에 살던 방식, 즉 공원을 산책하고, 주말에는 박물관이나 극장을 찾고, 식당에서 외식을 즐기던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 오롯하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까요? 빈민과 난민, 홈리스와 이주노동자들을 환대하고, 삶의 가치와 보람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공동체의 방식을 위해 기꺼이 이타주의를 실천하려는 선량한 이웃들, 수줍음과 생기, 유머가 넘치는 사람들이 만들던 황금시대는 사라졌어요. 노동의 손들이 세계를 빚고, 불은 강철과 혼인하며, 나그네들이 제 집에서 숙면하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은 어둡고, 과거에 유효하던 삶의 방식은 무너졌어요. 재난을 넘어서더라도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난파선 같은 현실, 삶의 균열에서 나오는 고통과 빈곤과 공허뿐이겠죠.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과거에 잃어버렸고, 옛날이 그렇듯 한 번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오늘을 덮친 재난을 견디고 극복하는 데 필요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밤하늘에 다시 별자리가 돋아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원상회복하는 게 우리가 바라는 것이겠지요. ‘오래된 별들의 재출현’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별자리는 불길한 징조들이 팽창하는 찰나에 나타나는 우리 마음에 숨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재난 속에서 우리 대부분의 마음에 숨은 “연대와 이타주의와 즉흥성의 별자리”(‘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반짝 하고 나타난다는 통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에는 의심 없는 신념과 회의 없는 지식이 넘쳐나고, 그것들은 머잖아 광신과 독선의 소용돌이를 일으키지요. 그리고 우리가 재난이 초래한 불행에서 허우적거릴 때 여기서 벗어나는 기적은 우리 안에서 싹튼다는 것이지요. 잊지 말아요. 슬픔과 무기력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 안의 불안과 실의에서 벗어나는 해법은 우리의 깊은 감정, 공감과 우애의 연대를 낳는 우리 마음의 선량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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