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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기자가 간다] 사라진 '달력 대량 주문'...연말 인쇄 업계는 변신 중

입력 2019-12-05 13:08 수정 2019-12-05 14:10

인쇄물 공장 가보니…위기감 가득, '소량 생산' 여부가 생존 결정해

▲4일 방문한 인쇄 회사 북토리 공장.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홍인석 기자 mystic@)
▲4일 방문한 인쇄 회사 북토리 공장.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홍인석 기자 mystic@)

취재의 시작은 '달력'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보고 일정을 짜는 세상에서, 연말시즌 주요 수입원이었던 종이 달력의 수요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위기에 직면한 것은 종이 달력만은 아니었다. 현업 관계자들은 책과 잡지도 내림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4일 인쇄물 공장이 밀집해 있는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업계 전반이 사양산업으로 가고 있다"라고 상황을 전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자료에 따르면 책의 발행 부수는 10여 년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1998년에는 1억9000만 부에 달했지만 2012년에는 8600부로 쪼그라들었다. 8000만 부도 곧 무너질 전망이다.

달력 역시 해마다 물량이 줄어들고 있다. 올해는 전년보다 20% 정도 감소했다. '달력 마케팅'에 열을 올렸던 은행들도 조금씩 부수를 줄였다. 현장에서는 2000년 초중반과 비교할 때 30~40% 줄어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종이 인쇄물 시장의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인쇄소 '보진재'의 폐업이다. 1912년 문을 연 보진재는 4대에 걸쳐 100년 넘게 운영한 곳이다. ‘춘추’, ‘문장’, ‘삼천리’ 등 이름있는 잡지를 찍었고, 1933년에는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인쇄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디지털에 밀리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인쇄 관련 장비를 19억2000만 원에 매각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북토리 인쇄물 공장 한편에 쌓인 2020년 달력. 이곳뿐 아니라 인쇄소 공장 전체 생산에서 달력 비중은 많지 않다고 했다.  (홍인석 기자 mystic@)
▲북토리 인쇄물 공장 한편에 쌓인 2020년 달력. 이곳뿐 아니라 인쇄소 공장 전체 생산에서 달력 비중은 많지 않다고 했다. (홍인석 기자 mystic@)

인쇄물 수요 하락에 폐업하는 곳도 있지만, 반대로 성장하는 회사도 있다.

대부분 새로운 판로를 개척한 업체들이다. 작가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교사, 학생들이 직접 책을 쓰고 소규모로 출판하는 트렌드를 잘 읽은 결과다. 웹툰과 웹 소설의 성장도 인쇄물 공장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다. 물량은 줄어들었지만, '발행 종수'가 늘어나는 것을 기회로 삼은 셈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자료를 보면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발행 종수는 3만~4만 종을 오갔으나 2016년에는 6만 종으로 증가했다. 작년에는 6만3476종을 기록,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날 기자가 찾은 인쇄물 공장에서도 가족의 얼굴이 넣은 탁상형 달력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쇄업체인 북토리 안현 과장은 "디지털 인쇄기를 갖춘 곳은 소량 부수라도 출판물을 만들 수 있다"면서 "최근에는 개인이 쓴 책, 가족 얼굴이 들어간 달력과 같은 소량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라고 설명했다.

▲가족 단위 또는 어린이집에서 자체 제작하는 2020년도 달력. 최근에는 개인이 만드는 달력이 많다고 했다.  (홍인석 기자 mystic@)
▲가족 단위 또는 어린이집에서 자체 제작하는 2020년도 달력. 최근에는 개인이 만드는 달력이 많다고 했다. (홍인석 기자 mystic@)

이 때문에 '소량 생산이 가능한가'는 최근 인쇄물 업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됐다.

전통적으로 인쇄물 공장은 '오프셋 인쇄'로 결과물을 만든다. 오프셋 인쇄는 평판 인쇄라고도 하는데 고무 블랭킷으로 인쇄물 골격을 잡은 다음 용지에 찍는 방식이다. 대량 인쇄 방식이어서 책의 단가를 맞추고 이윤을 남기는 데 적합하지만, 소량 인쇄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소량 인쇄 수요를 대응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인쇄 장비를 갖춰야 한다. 오프셋과 디지털 인쇄가 모두 가능한 북토리의 경우, 셀프ㆍ독립출판 매출이 전년보다 170%가량 성장했다.

하지만, 오프셋 인쇄로 명맥을 유지해온 곳이 소량 출판을 위해 디지털 인쇄로 넘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불황인 상황에서 장비에 큰 돈을 투자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격차가 발생한다. 개인 맞춤형 소량 생산 환경을 갖춘 곳은 불황 속에서도 성장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 인쇄 물량은 줄지만, 종류는 다양해지고 있는 최근의 추세에 대응한 곳만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청한 인쇄업계 관계자는 "오프셋, 디지털을 겸하면서 소량과 대량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가파르게 성장했다"며 "고객의 수요가 정말 다양해지고 있는데,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곳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라고 업계 상황을 전했다.

▲웹툰을 책으로 만드는 작가도 많다. 대부분 소량 출판이기 때문에 디지털 인쇄에 적합하다.  (홍인석 기자 mystic@)
▲웹툰을 책으로 만드는 작가도 많다. 대부분 소량 출판이기 때문에 디지털 인쇄에 적합하다. (홍인석 기자 mystic@)

이날 만난 인쇄 업계 종사자들은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미래에도 종이 매체는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토리 이정우 오프셋 공장장은 "인쇄기술은 산업 발전의 시초"라면서 "양은 줄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공장장은 또 "디지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종이 책 수요는 여전히 있고, 대체 할 수 없는 마력도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 역시 "생각보다 제작 과정에서 사람의 손이 많이 간다. 사람이 만든 책을 사람이 읽고, 그 사람이 또 책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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