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나도 ‘어시’가 있었으면

입력 2016-05-2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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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제23회 하계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4년 8월 중순,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가수 조영남의 공연을 보았다. 끝난 뒤 어떤 미국 할머니가 다가와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너 노래 잘 부르더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 할머니가 노망을 했나, 실성을 했나? 지금은 내가 한물이 아니라 두물도 더 간 사람이지만 그때는 결혼도 하지 않은 싱싱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조영남처럼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과 나를 혼동해?

마침 조영남이 다가오기에 그 할머니의 착각을 말해주었더니, 그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으며 친근하게 내 어깨를 안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 사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못생긴 사람이 재미는 있구나’ 하는 게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화투 그림은 그리기 전이었다.

대작(代作) 논란이 번져 검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그의 화투 그림은 사실 재미있고 친근하지만 예술성이 뛰어나거나 그의 노래처럼 독창성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른 사람이 8년 동안 300여 점이나 대신 그렸다는데, 조영남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의혹이 제기되자 그는 대작이 관행이며 그 사람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해온 조수라는 점, 오리지널은 다 자신이 갖고 있다는 점을 아주 ‘편하고 친근하게’ 기자의 어깨를 안고 말하듯이 강조했다. 아무래도 그는 ‘화투’를 잘못 친 것 같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예술에서는 독창적 개념이 중요한 데다 화투 연작을 보면 조영남의 작품이라고 누구나 알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유명 조각가들도 조수나 하도급 업자들에게 작업을 시킨다.

문제는 그가 앤디 워홀을 거론할 만큼 자신의 예술성과 독창성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 대작 사실을 폭로한 작가에게 준 돈이 작품당 10만 원에 불과할 정도로 빈약했다는 점이다. 폭로 동기를 “(내 조수 중 한 명인) 그 사람이 먹고살 게 없으니까 최후의 방법을 쓴 것 같다”고 매도한 것도 비난을 사고 있다.

예술계에 그런 관행이 있는 건 사실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다양한 논점과 다각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검찰 수사와는 별도로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이 정해져야 한다. 하지만 관행은 1)어떤 행동이 공동체 안에서 오랜 기간 폭넓게 이루어지고 2)그 행동의 근거가 되는 윤리적 규범이 공동체 안에서 오랜 기간 폭넓게 수용돼야만 인정될 수 있다.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행동이 비난을 받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 경우다. 조영남의 싼 공임에 대해 ‘열정페이’라는 비판이 높아지고, 그의 행동이 사기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저러나 조수가 있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유명 만화가가 제자들을 고용해 자기가 만든 스토리에 그림을 그리게 하는 걸 보고 놀란 게 20년 이상 전인데, 지금은 조수체제가 아주 정착돼 있나 보다. 유명 작가들과 교수들은 조수를 ‘어시’(Assistant)라고 부른다고 한다. 요즘은 석 자만 넘어가면 다 말을 줄이니 어시라는 말을 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좌우간 나도 어시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시에게 내 생각을 구술하면 얼마나 편할까. 더러는 그가 좋은 생각도 보태줄 게 아닌가. 조수라는 관행을 알고 보니 글쓰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 글도 간신히 겨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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