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미망인들이 경영전면에 등장해 그룹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오너 경영인으로 활약하는 사례가 재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아오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회사경영과는 동 떨어져 살아왔던 미망인 경영자들은 취임 당시 경영 전문성 부재에 대한 우려감을 불러 일으켰고, 일각에선 어린 자녀들을 대신해 어쩔 수 없이 등장한 한시적 경영인이라는 눈총도 받았다.
하지만 미망인 경영자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양귀애 대한전선 고문 등이 대표적인 미망인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안착을 보여준 여성 경영인으로 손 꼽힌다.
특히 가정주부 출신이며, 어린 자녀들로 인해 경영을 대신 맡았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친해졌고, 또 예상외로 회사를 빠른 시일에 안정시켰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닮은 꼴 경영인으로도 평가 받는다.
◆여장부인가 아마추어 경영인인가
물론 현회장과 양고문이 회사를 이끄는 스타일은 매우 다르다.
현정은 회장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빚어진 혼란을 수습하고 이어진 정상영 KCC명예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하는 등 현대그룹을 빠른 속도로 안정시키는 뚝심을 발휘했다.
2년전 묵묵히 대북사업을 이끌었던 남편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을 180도 바꿔버렸다.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항상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다섯번째 며느리'이자 고 '정몽헌 현대아산의장의 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으로 당당히 불린다. 가정주부에서 미망인 경영자로 우뚝 선 것이다.
이처럼 현 회장이 현대家의 불도저 정신을 잇는 뚝심의 '용장형' 여장부라면 대한전선 양귀애 고문은 고 설원량 회장의 빈자리를 전부 차지하기보다는 전문경영인과 함께 보조를 맞춰가며 회사의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한 '지장형' 스타일이다.
올 한해 현 회장과 양 고문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뛰어다녔고 열심히 회사를 돌봤다는 것이 그룹 내 관계자의 전언이다.
실제로 현 회장은 직원들에게 책, 삼계탕, 그리고 목도리까지 선물하며 어머니의 자상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냉혹한 경영자의 강인함도 보여주고 있다.
대북사업의 핵심이자 원조격인 김윤규 부회장의 비리가 드러나자 거침없이 내치는 단호함을 보여줬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다.
반면 양 고문은 구체적인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임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감성경영’에 몰두하고 있다. 해외 장기출장을 결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양고문은 지난 7월과 11월 머나먼 타국에서 근무하는 대한전선 현지법인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현지법인을 방문했다.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 국제 전선업계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회사측의 한 관계자는 “양고문은 회사 경영은 전적으로 임 사장에게 맡기고 오너로서의 대외적인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황소걸음이지만 그 파급은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사업 전부를 임 사장에게 맡기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2~3일은 회사에 나와 임 사장과 역할을 조율하고 있다. 특히 힘들게 인수한 무주리조트는 주말에 내려가 수시로 상황을 점검할 정도로 직접 챙기고 있다.
◆경영권 확립은 ‘안정적’, 향후 후계구도는 ‘미지수’
현 회장의 경영철학은 ‘순천자흥(順千子興)’. 순리대로 하면 흥한다는 의미다. 물론 현 회장이 곧이 곧대로 ‘경영철학’만을 고수한 것은 아니다.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장녀 정지이씨가 있기 때문.
지난해 12월말에 이뤄진 현대상선 인사에서 정 씨는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했고 이듬해 7월초 단행된 인사에서 회계부로 부서이동을 함과 동시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보통 사원의 경우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4년인 것을 감안해볼 때 이번 그녀의 경우는 대리로 승진한지 불과 6개월만에 이뤄진 초고속 인사인 셈. 한마디로 오너 자녀의 프리미엄을 누린 셈이다.
현 회장이 정 과장을 그의 경영철학에 어긋나는 초고속 승진을 시킬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가 그룹 총수자리로 오르게 된 배경과 무관치 않다.
현 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승계 받던 당시 딸 지이(당시 나이 26), 영이양(19)과 외아들 영선군(18) 등 1남 2녀 모두 경영권을 승계 받기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한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은 큰 딸을 경영자로서 키울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속사정은 양귀애 고문 또한 마찬가지다. 양 고문은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누이동생으로 슬하에 윤석ㆍ윤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장남인 윤석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대한전선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그는 현재 스테인리스 사업부 과장으로 재직중이다. 차남은 미국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영권을 이어받을 게 확실한 두 아들이 경영 일선에 투입될 때까지 대한전선그룹을 흔들림 없이 이끌어야 하는 고민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재계일각에선 “두 미망인 경영자가 현재까지는 별 무리 없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취약한 전문 지식과 경험, 시장의 냉소적 반응, 자녀들의 나이가 어려 경영권 후계구도가 불명확하다는 불안 요소를 안고 가야 하는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