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체 가까이에 전하를 가져가면 도체 표면에는 유도전하가 형성된다. 문제는 이 전하들의 분포가 꽤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전기장과 전위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어떻게든 유도전하의 분포를 알아내야 할 것 같지만, 영상 전하법은 전혀 다른, 대담하고도 엉뚱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낸다. 도체 반대편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 전하’를 슬그머니 그려 넣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만들어낸 가상의 전하가 만드는 전기장과 전위가 실제 물리적 상황의 전기장과 전위를 정확하게 재현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전하 하나를 상상했을 뿐인데 현실의 물리 현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니!
생각해 보면 물리학에는 이런 기발한 발상이 꽤 많다. 반도체에서 사용하는 ‘정공(hole)’도 그중 하나다. 고체 속 전자가 이동해 빠져나간 자리에는 빈 공간이 생긴다. 물리학자들은 이 빈자리를 마치 양전하를 가진 입자처럼 취급한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전자들이지만, 빈자리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입자라고 생각하면 복잡한 전자의 움직임을 훨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으로 가면 상상력은 한층 더 대담해진다. 양자장론에서는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입자(virtual particl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전자 두 개가 서로 밀어내는 현상은 광자를 주고받는 과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등장하는 광자는 전등에서 나오는 빛이나 실험실의 검출기로 관찰하는 광자와는 다르다. 독립적으로 검출되는 입자가 아니라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계산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존재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낸 셈이다.
반도체 속 전자의 운동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효질량(effective mass)’도 흥미로운 발상의 산물이다. 고체 속 전자는 주변 원자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움직인다. 이 영향을 일일이 고려하는 대신, 마치 전자가 진공 속에서와는 다른 질량을 가진 것처럼 가정하면 운동을 훨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전자의 실제 질량이 바뀐 것은 아니다. 주변 환경이 전자의 운동에 미치는 복잡한 효과를 ‘질량’이라는 하나의 물리량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을 가정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수학적 엄밀함의 잣대로 보면 이런 방법들은 복잡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편리한 꼼수나 픽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토록 기발한 가정들이 자연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복잡한 현상에서 핵심적인 원리를 찾아내고, 때로는 과감한 가정을 통해 문제를 단순화함으로써 오히려 자연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상상력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에서 어떤 가정이 유효하려면 자연의 기본 법칙과 모순되지 않아야 하고, 수학적으로 일관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실제 관찰과 실험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물리학자의 상상력은 자유롭지만, 그 상상이 자연의 질서와 맞닿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어쩌면 물리학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볼 수도 없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직접 추적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정하며, 때로는 익숙한 물리량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들은 현실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AI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과학의 난제를 단 며칠 만에 해결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놀라움과 함께 왠지 모를 울적함이 밀려오곤 한다.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계산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우리가 풀지 못한 문제의 답까지 찾아내는 시대에 과학을 하는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영상전하법은 내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과학의 즐거움은 반드시 정답을 더 빨리 찾아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 엉뚱한 생각이 놀랍게도 자연의 질서와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과학을 하는 진짜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