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전하진 칼럼] 지역경제의 새 전략 ‘개발보다 살림’

입력 2026-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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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서 창출한 가치 외부유출 막고
삶의 기본 충족하는 자립구조 구축
성장 넘어 성숙사회 기반 지향하길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저성장이 일상이 된 시대다.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져도 지역 상권은 쇠퇴하고, 경제가 성장해도 시민이 체감하는 삶의 풍요와 여유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과거의 성장 공식이 한계에 이른 지금, 지역발전의 기준도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얼마 전 열린 ‘2026 광명시 지역공동체 자산화 국제포럼’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자리였다. 광명시가 그간 추진해 온 기후위기 대응, 자원순환,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하나의 경제전략으로 묶어 보려는 시도였다.

핵심 의제는 지역공동체 자산화(CWB: Community Wealth Building)였다. 지역에서 창출된 가치가 외부로 새지 않고 지역 안에서 소비와 투자, 일자리로 이어지도록 경제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영국 프레스턴시는 병원·대학·공공기관 등 앵커 기관의 구매를 지역기업 중심으로 돌려, 시 안에서 쓰이는 조달액 비중을 5%에서 18%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 내 지출을 늘리고 지역 기업과 일자리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됐다. 프레스턴의 경험은 공공기관의 구매와 투자를 지역경제의 선순환으로 연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여러 도시도 공공조달과 지역금융, 공동체 소유를 엮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일본 역시 지역의 자원과 경제활동이 다시 지역의 지속가능성으로 돌아오는 순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방식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 지역의 부를 지역이 지키자는 것이다.

광명시의 사회연대경제 조직은 2019년 36개에서 2024년 180개로 늘었다. 이제 과제는 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지속가능한 시장과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공공조달을 개선하고 지역금융을 키우며, 토지와 자산의 공동체 소유를 넓혀야 한다. 지역의 병원과 대학, 공공기관도 지역 내 구매와 투자, 고용으로 이 구조를 떠받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에 부가 쌓여도 주민의 삶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와 먹거리, 돌봄을 여전히 외부에 기대고 있다면, 늘어난 소득은 그 비용으로 다시 빠져나가고 외부 충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소득 증대와 함께, 삶의 기본 필요를 주민이 가까이에서 스스로 해결하는 자립 구조도 구축해야 한다. 그 최소 단위로 살림셀(Salim Cell)을 제안한다. 행정 단위가 아니라 주민이 서로 얼굴을 알고 일상을 함께할 수 있는 규모의 생활 단위다. 이 규모여야 에너지를 나눠 쓰고, 먹거리를 함께 조달하고, 돌봄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가능해진다.

살림셀은 사람과 자원, 관계를 묶어 스스로 살아갈 기반을 갖춘 생활공동체의 기본 단위다. 한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를 떠올려 보자. 지붕의 태양광으로 전기를 만들고, 음식물과 생활 자원을 단지 안에서 순환시킨다. 공동 부엌에서 인근 농가의 먹거리를 함께 나누고, 아이와 노인 돌봄은 이웃이 서로 맡는다. 필수 자원의 외부 의존이 줄면 기초생활비가 낮아지고 위기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역 안 수요와 공급이 이어지면서 수리, 돌봄, 에너지 관리 같은 새로운 일거리도 생긴다. 다만 초기 투자비와 운영비, 실제 절감 효과는 여러 지역의 실증사업을 통해 데이터로 검증하고 성공 모델을 쌓아가야 할 과제다.

확산을 위해서는 정책체계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살림셀의 기본 요건인 에너지·먹거리·자원순환의 자립 수준(Zero Basic),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지역 안에서 해결하는 정도(Urban Basic), 주민 참여와 상호협력(Culture Basic)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지표를 새롭게 설정하여, 자립도와 정주력을 지역 평가와 재원 배분에 반영해야 한다. 자립 기반을 갖춘 지역이 늘어날수록 국가 전체의 회복력도 단단해진다. 이것이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국가의 핵심 전략이 되어야 한다.

CWB가 지역 내의 부가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살림셀은 그 성과를 주민의 생활 안정과 자립, 새로운 경제활동으로 연결한다. 두 모델이 결합할 때 지역은 소득을 얻는 경제공간을 넘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주공간이 된다. 주민의 자립도가 높아질수록 지역경제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도 함께 단단해진다.

성장의 시대가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가치를 두었다면, 성숙사회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는 데 가치를 두어야 한다. 이제 지역발전의 성공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와 함께 얼마나 스스로 살아갈 기반을 갖추었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지역의 미래 경쟁력은 더 많은 개발이나 투자에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시민의 삶을 지탱하고 함께 살아갈 힘, 곧 살림의 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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