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는 본래 기술을 독점하기 위한 권리다. 하지만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역설적으로 특허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도 커진다. 올해 4월 앤스로픽,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이 출범시킨 SAIL(Shared AI License Foundation)이 대표적이다. 회원사들은 일정 범위의 AI 특허를 상호 무상으로 이용하도록 해 소송과 협상 비용을 줄이려 한다.
이런 방식이 처음은 아니다. 이동통신에서는 3G·4G·5G 표준 구현에 여러 기업의 표준필수특허(SEP)가 필요해 이를 묶어 라이선스하는 특허 풀이 오래전부터 활용돼 왔다. MPEG·H.264 같은 영상 압축 기술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제품에 여러 특허가 얽힐수록 개별 협상 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SAIL은 기존 특허 풀과 결이 다르다. 기존 특허 풀이 필수 특허를 모아 외부 기업에 유상으로 라이선스하는 방식이라면, SAIL은 회원 간 상호 라이선스로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관련 소프트웨어의 분쟁 위험을 낮추는 데 초점이 있다.
출범 이후 캐논과 후지쯔 등이 합류하며 회원사는 11곳으로 늘었고, 공유 대상 특허 패밀리도 6만2000건 이상으로 확대됐다. 다만 보호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대상이 파운데이션 모델과 지원 소프트웨어에 집중돼 있어 반도체 제조공정과 하드웨어 설계는 원칙적으로 제외된다. 구글과 오픈AI가 아직 참여하지 않았고, 학습 데이터 저작권 문제 역시 해결 대상이 아니다.
한국 기업도 이 흐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주력인 메모리와 AI 반도체는 SAIL의 직접적인 보호 범위 밖에 있지만, 제품과 서비스에 파운데이션 모델이 결합될수록 그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SAIL 자체보다 이러한 움직임이 보여주는 방향성이다. 통신 산업이 SEP와 특허 풀을 통해 복잡한 권리관계를 조율해 왔듯, AI 산업에서도 경쟁과 공유를 병행하는 새로운 특허 질서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기업 역시 특허 확보에만 머물지 않고, 보유 기술을 어느 생태계와 연결할지까지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의 AI 경쟁에서는 ‘무엇을 보유하고 있는가’만큼 ‘어느 특허 생태계와 연결돼 있는가’도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고은주 삼성벤처투자 투자심사역·변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