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AI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가장 정교하게 축소한 소통 환경을 제공한다. 사용자가 원할 때 언제든 응답하는 온디맨드형 사교성과 어떤 의견 충돌이나 거절도 없이 사용자에게 맞춰주는 비거절성 무조건적 지지가 결합되면, 이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편안한 도피처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무균 상태의 관계에 길든 뇌는 점차 현실의 사소한 마찰조차 견디지 못하는 상태로 변한다. 사회적 면역력의 조용한 붕괴다.
신체의 면역계가 적절한 병원균 노출을 통해 단련되듯, 인간의 사회적 면역력도 미세한 거절과 의견 차이라는 낮은 강도의 마찰을 거치며 형성된다. 신경학자 스티븐 포지스(Stephen Porges)의 다중미주신경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자율신경계는 타인의 표정 변화와 어조의 불일치 같은 갈등 신호를 감지하고 조율하며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진화했다. 또한 사회적 거절의 고통은 신체적 통증과 동일한 뇌 회로에서 처리된다는 것이 신경과학 연구의 일관된 보고다. 두 회로 모두 미세한 자극에 노출될 때 비로소 역치가 조정되며 단련된다. 자극 자체가 사라진 환경에서, 회로는 단련되는 대신 둔감해진다.
이러한 적응은 모든 사용자에게 일어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훨씬 빠르고 깊게 일어난다. 역설적이게도, 자극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회로를 덜 쓰게 되는 집단이다.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Elaine Aron)이 정립한 ‘감각 처리 민감성(SPS) 개념과 그 기질을 지닌 매우 예민한 사람(HSP)’ 연구가 그 양상을 설명한다. 한 가지 짚어둘 점이 있다. 일상에서 종종 쓰이는 초민감장애나 극도민감성증후군 같은 표현은 DSM-5나 ICD-11에 등재된 공식 진단명이 아니다. SPS는 치료해야 할 병이 아니라, 환경 신호를 정교하게 처리하도록 진화상 보존된 정상 기질에 가깝다.
SPS 기질을 가진 사람의 뇌에 디지털 환경은 양가적 위치에 선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거친 자극에서 거리를 두고 강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완충재로,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쏟아지는 알림과 감정적 콘텐츠가 무의미한 자극을 걸러내는 필터를 압도하며 신경계를 과부하 상태로 몰아넣는 증폭기로 동시에 작동한다. 같은 환경이 같은 사람에게 정반대 효과를 내는 셈이다.
발달심리학자 제이 벨스키(Jay Belsky)는 좋은 자극은 더 좋게, 나쁜 자극은 더 나쁘게 흡수하는 기질을 차별적 감수성 이라 정리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자극에 쉽게 탈진하는 예민한 사용자는 무조건적 지지를 제공하는 AI 뒤로 더 깊이 숨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그 도피는 면역력을 회복시킬 기회를 축소시킨다.
회복의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의도적으로 마찰을 다시 선택하는 것.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사례로, 싱가포르 국립대학교는 24시간 동안 전자기기 사용을 최소화하는 ‘제로 테크 챌린지’와 ‘잔디 밟기(Touch Grass) 주간’을 운영했다. 학생들은 스크린 대신 인쇄물과 펜을 사용하고, 야외에서 대면 토론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의존도가 낮아졌을 뿐 아니라, 집중력과 정서적 안정이 함께 회복됐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디톡스 캠페인이 아니라, 신경계를 마찰에 다시 노출시키는 신경 위생의 한 형태에 가깝다.
국내에서도 청소년 대상 디지털 디톡스 캠프와 단기 야외 체험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다. 짧은 기간이라도 스마트 기기에서 멀어진 채 또래와 직접 부딪치는 시간을 갖는 것, 그 자체가 신경계를 다시 사회적 마찰에 노출시키는 회복 과정에 가깝다. 핵심은 기술과의 단절이 아니라, 회로가 단련될 자극을 의도적으로 되찾는 일이다.
기술이 제공한 도피처 안에서, 작은 마찰 하나를 다시 선택해 보는 일은 비효율이 아니라 신경계의 기초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모든 거절과 모든 자극을 다시 견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마찰의 강도와 속도는 다르며, 그것을 정직하게 가늠하는 일이 먼저다. 다만 우리가 마주한 환경 안에서 무엇이 조용히 약해지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감각이 필요하다. 신경계는 자극 자체보다, 자극을 마주하는 자세에 따라 단련되거나 약해진다.
한유진 | CASA 융합심리연구소 소장 | 한국아동미술치료학회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