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 다중위기 시대에 마주한 ‘불편한 진실’

입력 2026-05-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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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에너지 대란에 전쟁공포 겹쳐
일상의 기대 거스르는 조치 잇따라
복합위기 맞설 사회적 논의 나서야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같은 태양이 뜰 것을 믿고, 수도꼭지를 틀면 깨끗한 물이 쏟아질 것을 기대하며, 스위치를 켜면 당연히 전등이 켜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기대치’는 우리 삶을 지탱하는 심리적 안전장치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주디 버구온은 이를 ‘기대치 위반 이론’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 있을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 기대를 벗어나는 ‘위반’이 발생할 때 비로소 그 대상을 강렬하게 인지하고 의미를 재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안전장치가 동시다발적으로 붕괴되는 ‘다중위기(polycrisis)’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코로나 이후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 에너지 대란, 지정학적 충돌이라는 파도가 동시에 덮쳐오면서, 우리가 믿어 왔던 ‘상식적인 미래’는 하나둘 배신하기 시작했다.

환경 분야에서 발생하는 기대치 위반은 ‘자연의 속도’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을 “완만하고 서서히 변화하며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존재”로 기대해 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기상 현상은 이러한 기대를 비웃듯 폭주하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삼천리강산’이라는 기대는 2022년 강남 일대를 침수시킨 기록적인 폭우와 매년 갱신되는 ‘관측 사상 최고 기온’의 폭염 앞에서 산산조각나고 있다.

그리고 예년만 해도 4월 중순에 벚꽃을 기대했지만, 올해는 3월에 이미 만개했다. 부산보다 열흘 늦게 피던 서울 벚꽃이 이제는 닷새 차이로 좁혀졌다. 기후변화가 ‘봄의 속도’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에너지 부문에서의 기대치는 더욱 견고했다. 현대인에게 에너지는 공기와 같다. ‘언제나 저렴하고 항상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는 기대는 현대 문명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최근 전 세계를 덮친 에너지 위기는 이 기대를 잔인하게 깨부쉈다. 한국은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최근 발생한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 고조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대치 위반을 경고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 유가는 폭등하고,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순식간에 위기에 빠지고 있다. 머지않아 ‘개인 승용차를 이용해서 가족끼리 여행을 하고 여름에 에어컨을 켜서 시원함을 느끼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사치가 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불편한 예측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에너지 위기와 환경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동 방식에 대한 기대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정부는 최근 유가 폭등으로 인한 에너지 절감과 석유 위기 극복을 위해서 차량 5부제 (전국 공공기관에선 차량 2부제)를 시행하고 있다. 과거에는 ‘내 차를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운행할 수 있다’는 기대가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일마다 차량 번호 끝자리에 따라 운행이 제한되는 ‘불편한 일상’이 현실이 되었다.이는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우리의 자유와 편의에 대한 기대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조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도 이러한 기대치 위반이 오히려 시민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기후동행카드 발급과 대중교통 이용률이 늘어나고, 카풀과 자전거 출근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결핍의 경험’이 수십 년간의 환경 캠페인보다 더 강력하게 대중의 행태를 교정하고 있는 사례다.

기후 담론에서의 기대치 위반은 사회적 신뢰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은 기업이 ‘친환경’을 표방할 때 그에 부합하는 윤리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겉으로만 환경을 외치고 실제로는 탄소 배출을 일삼는 ‘그린워싱’ 행위가 적발될 때, 소비자가 느끼는 배신감은 일반적인 기업 범죄보다 훨씬 크다. 다중위기 시대에 소비자들은 점점 더 예리해지고 있으며, 기대치를 위반한 기업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누적된 신뢰를 순식간에 잃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무너진 기대를 부여잡고 과거의 풍요로 회귀하려는 망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처참한 균열을 새로운 시스템 설계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 차량 5부제, 에너지 가격 현실화, 중동발 유가 충격에 대한 대비, 그리고 다중위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우리는 이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누려온 안락한 기대치는 이미 유통기한이 끝났다. 자연의 역습은 물론이고, 지정학적 충돌과 에너지 대란은 앞으로 더 잔인하게 우리의 기대를 배신할 것이다. 그 배신의 고통이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인류는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하는 ‘새로운 기대치’를 설정해야 한다.

익숙한 안락함을 포기하는 결단만이, 무너져 내리는 지구 위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시간이 없다. 다중위기가 완전한 파멸로 이어지기 전, 지금 당장 탐욕의 관성을 멈춰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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