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서(書)는 자연에서 비롯된다

입력 2026-03-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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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성 서예가/한국미협 캘리그라피 분과위원장

아직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일교차가 심하지만, 모든 천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꽁꽁 얼었던 흙을 밀어 올리며 작은 새싹이 움트는 춘삼월이 설레임과 함께 찾아왔다. 공원 모퉁이 작은 매화나무에는 이미 완연한 봄이 열렸고, 마른 가지 끝에 연둣빛이 번지는 풍경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생명의 힘을 실감하는 경이의 시간이다.

이때 예술가는 자연 앞에 서서 겸허해진다. 아무리 치밀한 구상과 숙련된 기법을 지녔다 하더라도, 한 줄기 새싹이 보여주는 생명의 힘을 온전히 재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연은 설명되지 않는 질서와 우연, 필연과 변화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 앞에서 예술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오히려 배우는 자에 가깝다.

봄은 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에게 새 봄의 창작 욕구는 더욱 강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흙냄새를 머금은 공기까지 자연이 주는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깨운다. 겨울 동안 쌓아두었던 사유와 감정은 봄을 맞아 비로소 외부로 흘러나와 마치 얼음 아래 갇혀 있던 물이 흐르기 시작하듯, 내면에 머물던 생각들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생동감이다. 다소 거칠고 미완일지라도,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이미 충분한 창작이다.

동한 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채옹(蔡邕)이 말한 “書肇於自然 (서조어자연)”<사진>은 서예 미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명제이다. “서는 자연에서 비롯된다. 글씨의 근원은 자연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서예의 본질과 창작의 근원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채옹은 서예를 단순한 문자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근본으로 보는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생명 운동이 만나는 표현으로 보았다. 작은 풀잎 하나에도 나름의 질서와 시간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것과 호흡을 맞추며, 그 안에 스며든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에 깊이를 더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본질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한다.

필획의 기운 생동함, 질서와 자유의 균형, 천지자연의 기운이 서자(書者)와 혼연일체가 된 필묵은 서예가의 필연적 바람이자 지향점이다. 예술이 그림자라면 자연은 이데아다. 자연을 떠나서는 예술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시공을 초월해 자연에 내재한 미의 질서를 심미의식으로 삼아, 자연의 생명력이 스며든 글씨 꽃을 피우기 위해 오늘도 씨를 뿌리고 마음을 다해 글밭을 가꾼다. 좀 늦게 피고 질 뿐 꽃은 꼭 필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당신의 가슴에도 당신만의 소중한 꽃이 피기를 기원하며, 이 봄날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영원할 것 같은 이 봄도 한순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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