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산업혁명 시기, 기계화로 인한 일자리 상실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망치를 들고 기계를 부쉈다. 이른바 러다이트 운동이다. 21세기 우리는 그 장면을 데자뷔처럼 목격한다. 그러나 역사는 기계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계미학, 곧 기능주의 미학이 싹텄다. 인간의 손을 밀어낸 기계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그 격랑 속에서 기술과 예술이 교배하며 ‘산업디자인’이 탄생했다. 기술의 건조함을 인간의 감성으로 감싸 안으려는 시도였다.
30여 년 전, 내가 박물관에 첫발을 들였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오래된 유물을 모아놓은 곳에서 디자이너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디자인 이전의 문명, 즉 인간의 욕구와 감성이 사물에 어떻게 스며있는지를 보았다. 박물관은 ‘잘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내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잘 만드는 것을 넘어,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일이 핵심이다.
잘 만드는 손의 능력이 무력해진 인공지능 시대, 그때의 경험은 기능과 효율을 숭배하던 모더니즘 이후 다시 인간의 지성을 호출하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작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인력거꾼 김첨지는 노력 부족 때문에 몰락한 것이 아니다. 그의 불행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력보다 기계를 우선시하는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손재주는 단순히 손을 잘 쓰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표현할지를 가늠하는 눈, 곧 선택의 감각까지 포함된다.
디자인은 오랫동안 산업의 효율과 합리에 복무해 왔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완벽한 결과물 속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를 가려내는 ‘안목의 싸움’으로 바뀌고 있다. 이 안목은 결국 인간의 감각과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디자인 스튜디오는 박물관 곁을 지켜야 하고, 디자이너는 머리를 식힐 때조차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이 오차 없는 정답을 낼수록, 우리는 불확실하더라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기계적 조형의 빈틈을 메우는 것은 유물에 담긴 유구한 삶의 이야기와 캔버스가 제기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사양 산업이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물리적인 조형을 인공지능이 대신할수록, 우리는 다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환경에 맞춰 변하고 진화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의 숙명이자 인간의 생존방식이다. 디자이너는 ‘만드는 손’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심장’을 우선시해야 한다. 인공지능 역시 기술일 뿐이다. 손만이 아니라, 뇌로 사고하고 가슴으로 감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다. 애초부터 디자인은 손과 머리, 가슴의 합작이었다. 그것이 인류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