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타인’되어 바라보기

입력 2026-03-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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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창밖에 밤의 장막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었다. 화산처럼 분노를 뿜어 내었던, A의 기운이, 공기 중에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아내의 외도에 분노했고, 동시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가 떠난 자리, 의사로서의 나 역시 거대한 감정의 파도 끝자락을 마주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산다는 것은 매일 타인의 감정을 돌보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폭풍도 다스리는 고독한 수행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묻는다. “선생님은 화가 날 때 어떻게 하세요? 이 지옥 같은 기분에서 어떻게 벗어나죠?” 나는 그럴 때마다 나지막이 대답한다. “나를 ‘나’라고 부르기를 잠시 멈춰보세요.”

인간의 뇌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전원을 꺼버린다. 대신 공포와 분노를 주관하는 편도체가 주도권을 잡는다. 이때 우리는 감정과 자신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 ‘나는 지금 화가 난다’는 문장은 곧 ‘나=분노’라는 공식이 되어 버린다. 내가 곧 분노 자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눈앞의 상대를 할퀴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선택을 한다.

미시간대학교의 심리학자 이선 크로스(Ethan Kross)는 이 현상을 자기 거리두기(Self-Distancing)라고 명명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경험할 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할 경우,전전두엽의 이성적 영역이 깨어나고, 편도체의 과활성화가 억제된다. 감정의 강도는 줄지 않으나,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생각이 같은 고통 속에서 맴도는 현상(반추사고)도 감소한다.

몇 년 전, 나 역시 그런 순간을 겪었다.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머릿속에는 날 선 말들이 떠올랐다. 진료실에서 그렇게 자주 쓰던 그 기법. 정작 그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최영훈이라는 남자가 진료실에 있네.’ 분노에 휩싸인 “나”가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점차, 한 편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처럼,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감정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 갔다.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 그 남자의 분노는 당연히 느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불합리한 이유도 아닌, 그저 한순간의 반응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말을 늦추거나, 잠시 침묵하거나, 혹은 상황을 더 넓게 바라보는 선택. 그리고 놀랍게도 그 선택은 상황을 훨씬 부드럽게 만들었다.

“영훈이가 지금 비난받았다는 생각에 활활 타고 있구나.”

이렇게 나를 타자화(他者化)하는 과정은 차갑지만 따뜻하다.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에 차갑고, 고통받는 나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따뜻하다. 타인을 위로하듯 나를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몇 달 후, A는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 바라보니 A가 참 가여워요. 그동안 팍삭 늙고 야위었네요. A에게 밥을 사주고, 산책을 시켜야 겠어요” A의 눈빛은 처음보다 더 맑고 깊어진 듯하다. 면담이 끝난 후,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하며, 나는 영훈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두워진 밤하늘의 공기는 이전보다 한결 하늘하늘해 보였다.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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