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어떤 소나무 한 그루

입력 2025-12-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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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내가 자주 가는 대관령 아래에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 있다. 대관령 전체 구간 중에서도 소나무가 가장 많은 길이다. 2007년 경복궁을 복원할 때 여기 소나무를 베어 기둥으로 썼다. 대궐의 기둥으로 쓸 수 있는 소나무는 지름이 90cm쯤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 몸 위에 얹어지는 지붕과 기와의 무거운 하중을 견뎌낼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데, 그게 다 금강소나무를 기둥으로 지은 건물이다. 다른 나무는 그만한 무게를 버텨내지도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옛날에 궁궐을 짓거나 임금님의 관을 짤 때에도 금강소나무를 썼다. 나무 줄기의 색깔이 붉다고 ‘적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표면이 거무튀튀한 일반소나무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금강송, 금강소나무라고 부르는 게 바른 말이고, 나무에 대한 예의다.

물론 강원도 대관령에만 있는 나무는 아니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일원에 잘 자라는 이 소나무는 나무 재질이 뛰어나고, 껍질이 얇고 나무 몸통의 빛깔도 붉은색을 띠고 속 색깔도 붉은색이거나 적황색을 띤다. 산골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는데, 서낭당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이렇게 굵은 금강소나무가 서 있다. 이런 나무들은 잘못 건들면 동티가 난다. 정말 그렇든 아니든 마을 사람들 모두 영험하게 여긴다. 마을에 있는 서낭목도 그렇고 산에 별다른 표찰 없이 무리 지어 서 있는 나무들도 그렇다. 그래서 이런 나무를 벨 때는 거기에 맞는 의식을 치른다. 새로 경복궁의 기둥으로 쓸 나무를 베어낼 때도 그랬다.

궁궐의 기둥이나 왕족의 관으로 쓰일 나무를 벨 때는 벌채에 앞서서 우선 산신과 나무의 영혼을 달래 위령제를 지낸다. 그리고 나무 앞에 교지를 펴들고 ‘어명이오!’를 외치고 이 나무가 나라의 부름에 따라 큰 재목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린다. 예전 궁궐을 짓는데 쓰였던 소나무는 황장목이라고 하여 일반인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황장목으로 지정된 곳엔 황장금표라고 하여 이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했다.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이름 그대로 이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길이다. 중간에 ‘어명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2007년에 경복궁 기둥으로 베어낸 소나무 그루터기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 마룻바닥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유리로 끼워 넣어 직경 1미터나 되는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의 나이는 출생기록으로 알고,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로 안다. ‘어명정’의 소나무는 철종 임금 시절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미국에서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될 쯤 바늘귀만 한 솔씨에서 처음 싹을 내밀었다. 구한말의 격동과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지켜보고, 숱한 가뭄과 홍수를 겪고, 해방과 육이오를 겪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자라고 자라 마침내 경복궁의 기둥이 되었다.

사람에게 사람의 역사가 있듯 산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있고, 자연의 기록이 있다. 나이테를 보면 어느 해에 가뭄이 들고, 어느 해에 산불이 났는지도 알 수 있다.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해 모든 걸 다 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길을 걷는 것은 이렇게 자연의 기록을 살피고 또 자연에 대해 우리가 몸을 낮추고 나무처럼 우리 스스로 겸손해지는 공부를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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