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상식이 완전히 깨졌다. 최근 데이터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S&P 500 기업의 시장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반면, 총고용은 오히려 줄어드는 곡선은 현실이 됐다. 기업은 인력을 더 고용하지 않고도 더 빠르게 성장한다. 생산성의 근원이 인간의 손이 아닌 인공지능의 알고리즘과 데이터 처리 능력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성장 엔진은 인간 노동이었다. 사람이 더 일하면 생산이 늘고, 그 결과 임금과 소비가 함께 상승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생산의 주체로 떠오르면서 ‘노동의 양’이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질’이 성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AI는 쉬지 않고 일하며, 거의 실수하지 않으며, 학습할수록 더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기업은 사람을 늘리지 않고도 혁신과 수익을 동시에 달성한다. 제조, 금융, 미디어, 의료, 법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 노동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AI는 생산의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소득의 집중화를 초래한다. AI 기술과 데이터 자본을 가진 소수의 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만, 다수의 노동자는 그 성장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결국 우리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분배 구조의 왜곡이라는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이제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된다. 과거의 방식인 고용을 전제로 설계된 일자리 정책, 실업급여, 연금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시점이 수년 내에 온다. 복지의 기반이던 ‘노동소득’이 사라지면 복지의 재원도 함께 붕괴한다. 정부가 아무리 일자리를 만들려 해도, 기업은 이미 AI로 생산성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노동과 복지, 그리고 소득의 연결 고리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일하면 먹고산다”는 전통적 사회계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일하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논의해야 한다.
첫째, AI가 인간의 노동 없이도 부를 창출하는 시대에는, 그 부를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AI 기반 기본소득(AI Dividend Basic Income)이 필요하다. 단순한 복지 문제가 아니라, AI가 만든 부가 인간 전체로 재분배되는 시스템 설계의 문제다. AI 기업의 수익 일부를 사회기금으로 환원하고, 데이터 사용에 대한 개인 보상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그 출발점이다.
둘째, 교육체계의 전면적 개편이 불가피하다. AI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에는 ‘기술을 배우는 교육’보다 ‘AI와 협업하는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산업화 시대의 교육은 표준화된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버려야 한다. AI는 지식을 대신하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윤리를 판단하는 인간의 고유성을 키우는 방향이 담겨야 한다. 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문제의식(Q)과 실행의지(E)를 훈련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배우면 일할 수 있다’는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문제의식 속에 질문할 수 있는 인간’이 생존하는 시대다.
마지막으로, 노동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는, 인간은 더 이상 생산 수단이 아니다.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인간다운 일인가”의 질문을 해야 한다. 돌봄, 예술, 교육, 지역사회 활동, 창작 등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보상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 포트폴리오형 일자리, 사회기여 크레딧 제도 등 새로운 형태의 노동 시스템이 필요하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인간적인 일을 할 자유를 주는 방향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재설계해야 하는 시대에 서 있다. AI 이후의 시민사회는 방향과 존엄이 더 중요하다. AI는 인간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경제적 안전망, 교육개편은 지능 격차 해소의 기반, 노동 재정의는 인간 존엄의 회복이다. 이 세 가지가 함께 구축될 때, 우리는 ‘K곡선’의 위기를 넘고 인간 중심의 AI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신철호
OGQ 대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AI, 데이터, 플랫폼 등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