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들 잠든 새벽에 산책을 나선다. 집앞의 빵집을 지나는데, 제빵실에 불빛이 환하다. 새벽에 나온 제빵사가 빵을 굽고 있다. 미명 속에서 동네를 가로질러 여뀌, 메꽃, 달맞이꽃, 산국, 쑥부쟁이, 개미취, 구절초 같은 야생초가 어우러진 산 아래 진입로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조간신문 두 가지를 읽으며 햇사과 한 알을 껍질째 아삭아삭 씹어 먹는다. 아침에 사과 한 알을 먹는 걸 30년째 실행하는데, 이 성의를 갖고 챙기는 생활습관이 소규모 생활을 건사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루에 사과 한 알을 먹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인생사에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까마는 어쨌든 잔병치레가 없고 날마다 허리 곧추세우고 산책에 나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노트북과 책 두 권을 넣은 백팩을 메고 단골 카페로 나와서 글을 쓴다. 어제 쓴 것을 대강 훑어보고 오늘 분량을 꼼꼼하게 쓴다. 계절이 바뀐다고 평탄한 일상에서 돌연 자아와 의지의 지형이 바뀔 만한 사건이 터지는 법은 없다. 그저 가을의 고요한 침잠 속에서 일상의 안녕은 바위만큼이나 단단하다. 나날의 안녕 덕분에 나미비아의 서쪽 사막 주변에 서식하며 뱀을 사냥하는 뱀잡이수리에 관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을 테다. 지구 온난화와 무분별한 개발 행위로 서식지가 좁아진 뱀잡이새들이 위기에 내몰린다고 한다. 뱀잡이수리새 부모들이 알을 품지 않고 둥지를 떠나는 바람에 알들이 직사광선에 속수무책으로 익어버린다고 한다.
어떤 날은 저 먼 시베리아나 몽골에서 날아와 민통선을 넘어 파주 평야지대에 내려앉아 가을의 초연한 햇볕 아래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겨울 철새를 탐조하러 나간다. 더러는 자동차를 몰고 갈대가 우거진 서해안 모래사구를 찾아 일없이 걷다가 돌아온다. 물 속 같은 평온 속에서 혼자 버려진 외로움이 사무칠 때가 있다. 외로움은 마치 돌발사고 같다. 그렇다고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다. 나는 갖지 못한 것을 애달파하지 않고 가진 것에 감사한다. 가을의 아늑하고 고요한 품성, 순환하는 계절의 영원한 덧없음 속에서 나의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새벽마다 빵을 굽는 제빵사같이 날마다 사과 한 알을 씹어 먹고 꾸준히 몇 줄씩 쓰는 내 일상의 견고함이 자랑스럽다. 가끔 뱀잡이수리새 어미들이 둥지에 방치한 탓에 부화를 하지 못한 채 익어버린 알들을 생각하거나 제 궤도를 도는 별들을 바라본다. 세상에 안 계신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그리고 이 지구별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을 떠올린다. 세상을 다 거머쥘 듯 거친 야망을 품고 질주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이 들며 소규모의 삶을 경영하는 깜냥과 한 줌의 지혜를 얻은 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적게 벌고 그 수입을 쪼개 살림을 경영한다. 주말엔 북엇국을 사 먹고 로또 복권을 사거나 벗들과의 모임에 나가 허튼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든다. 이 가을에도 여전히 햇사과 한 알과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를 허락하고, 허망한 욕심에 휘둘리지 않아도 될 만한 내 작은 삶과 세상의 건재함을 기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