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한 의도가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한 의도일수록 더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 법은 하나의 조항을 고치면서 거미줄처럼 얽힌 다른 법률들을 간과하였다. 기존 법체계와의 정합성을 따지지 않았다. 그 결과, 기업들은 출구 없는 해석의 전쟁터로 내몰린다.
노란봉투법의 핵심 문제는 ‘사용자’의 정체성 모순이다. 개정안은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다면 사용자라고 규정한다(제2조 제2호 후단). 직접 고용하지 않아도 임금이나 근무시간을 좌우할 수 있다면 법적 사용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원청의 사용자 지위가 의제별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A 건설회사가 도급단가를 정하여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좌우한다면 ‘임금’ 의제에서는 사용자가 된다. 그런데 같은 교섭 테이블에서 ‘근무시간’을 논의할 때, 이를 하청이 자율적으로 정한다면 A는 갑자기 제3자가 된다. 마치 스위치처럼 사용자성이 켜졌다 꺼진다. 모든 교섭은 시작도 전에 ‘원청이 어디까지 사용자인가’를 따지는 소모전이 된다. ‘실질적 지배·결정’의 기준이 불분명하므로 현장은 끝없는 해석의 전쟁터가 될 뿐이다.
더 큰 역설은 ‘준법의 덫’이다. 원청이 노란봉투법을 성실히 준수한다고 하자. 하청 노조와 교섭한다. 근로조건 개선을 논의한다. 바로 그 순간, 다른 법률의 올가미에 걸린다.
먼저 파견법이다. 파견법은 원청이 하청 직원을 직접 지휘·명령하면 불법파견으로 본다. 그런데 노란봉투법은 원청이 하청 직원의 근로조건을 교섭하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하청 노조가 “우리 휴게시간을 30분에서 1시간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원청이 이를 수용하여 하청업체에 지시하였다면, 이는 근로조건 개선이지만, 동시에 파견법상 ‘직접 지휘·명령’의 증거다.
다음은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이다. 원청은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도급인이 지배·관리하는 장소”에 대한 안전 의무를 진다(제63조, 제10조제2항). 중대재해처벌법도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경영책임자를 처벌한다(제4, 5조). 이처럼 두 법 모두 ‘지배·관리’가 핵심 요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란봉투법에 따라 하청 노조와 인력 운용, 설비 투자, 작업 공정을 교섭하면 어떻게 될까. 교섭 회의록에 “원청이 하청의 안전장비 예산을 증액하기로 합의”라고 적혀있다면, 훗날 사고 발생 시 검찰은 이를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활용할 것이다.
결국 원청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노조법을 지키려 교섭하면 파견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이 될 수 있다. 교섭하지 않으면 노조법을 위반한다. 어느 수를 두어도 패착이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실질적 지배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위 법들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다르다. 지금까지 ‘실질적 지배력’의 경계는 모호하였다. 원청들은 이 모호함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거리를 두면서도 통제하는 묘한 균형 말이다. 노란봉투법은 이 균형을 깬다. 단체교섭이라는 공식 절차를 강제하고, 교섭 기록은 명백한 증거로 남는다. 회색지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승패와 무관하게 끝없는 분쟁이다. 그리고 그 분쟁이 시작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법을 지키는 데에서 시작한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요제프 K는 어느 날 죄목도 모른 채 체포된다. 그는 법의 실체를 찾아 헤매지만, 법은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처형대에 서 있었다. 노란봉투법 앞에 선 기업들도 K와 다르지 않다. 플래카드의 요구가 법이 되었지만, 그 법은 어디서나 충돌하면서도 어디서도 명확하지 않다. 한 법을 지키면 다른 법의 심판대에 선다. 무엇이 죄인지 모른 채 법정을 헤맨다.
좋은 의도가 곧 좋은 법은 아니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진짜 사장’을 찾는 일이 카프카적 부조리극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그 설계 없이는, 출근길 플래카드가 요구한 ‘진짜 사장’도, 법이 약속한 ‘진짜 교섭’도 모두 또 다른 해석 전쟁의 불씨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