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거대언어모델(LLM)의 등장은 충격에 가깝다. 번역과 작문, 자료 조사, 코딩 등 복잡한 지적 활동 영역에서 인간에 버금가는, 때로는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과학 연구 분야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단백질 구조 예측의 난제를 해결하며 유전공학과 신약 개발 연구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고, 이는 노벨상 수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AI는 여러 분야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뛰어난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AI 혁신을 체감하고 있을까? 통제된 환경이나 특정 과업이 아닌, 복잡다단한 현장에서 AI는 과연 ‘혁신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AI가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영역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AI는 인간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 반복적이고 방대한 작업에서 인간보다 수백, 수만 배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한다. 수만 페이지의 문서를 요약하고, 수백만 줄의 코드에서 특정 패턴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교 검토 작업을 순식간에 처리한다. 인간의 노력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시간 절약의 마법사’인 셈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의 수준은 대부분 ‘평범하거나 우수한’ 정도에 머무른다.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I가 생성한 수많은 가설과 논문 초안이 연구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연구자들이 새롭고 독창적인 연구 대신 기존 연구를 답습하거나 검증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게 만들고 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거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최적의 전략적 판단을 내리거나,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등, 거대한 임팩트를 가져오는 진정한 ‘혁신’의 영역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다.
또 다른 사례도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 연구에 따르면, AI 코딩 지원 도구가 숙련된 개발자의 생산성 향상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잘못된 코드를 제안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 수정하는 과정에서 개발 시간을 19% 더 소요하게 만들었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의 연구에서 나타난 ‘인지적 오프로딩’ 현상 또한 마찬가지다. AI를 활용해 과제를 수행한 학생들이 글을 더 빨리 썼지만, 내용의 독창성과 깊이는 오히려 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획, 전략 수립 등 비판적 사고가 필수적인 업무 영역에서 AI에 대한 무비판적 의존은 문제 해결의 깊이를 얕게 만들고, 결국 조직의 혁신 잠재력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결국 AI는 그 자체로 혁신을 보장하지 못한다. 평범한 수준의 결과물을 대량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생산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도구이지만, 그 결과물을 비범한 성과로 바꾸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다. AI가 절약해준 시간을 인간이 얼마나 더 고차원적인 사유와 창의적인 실험, 비판적인 검토에 쏟아붓느냐에 따라 AI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과거 공장에 중앙 집중식 동력을 제공하던 증기기관이 전기 모터로 대체되던 시기를 떠올려보자. 단순히 동력원만 바꾼다고 생산성이 극대화되지는 않았다. 각 기계 옆에 모터를 두는 ‘분산적 동력’ 시스템에 맞춰 공장 전체의 작업 공정을 재편하는 막대한 ‘전환 비용’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혁신의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이는 최근의 클라우드 혁신과도 맞닿아 있다. 기업들은 단순히 서버를 빌려 쓰는 것을 넘어,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유연하게 바꾸며 새로운 혁신을 창출했다.AI의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존 업무에 AI를 끼워 넣는 것을 넘어, AI 네이티브적인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와 조직 구조를 고안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AI가 내놓은 평범한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여러 결과물을 창의적으로 융합하며, AI는 할 수 없는 독창적 질문을 던지는 인간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AI 시대의 진정한 혁신은 AI와의 협력을 통해 인간 고유의 비범함을 어떻게 증폭시킬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