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화 이후 우리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관심을 선점하고, 자동화된 피드가 매순간 새로운 자극을 주입한다. 문화 소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빠르고 편리한 관람’은 이제 박물관 홍보의 표준 문법처럼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QR 코드, AI 음성 해설, 실시간 추천 시스템은 관람객을 부지런히 다음 정보로 몰아간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편리함이 과연 박물관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지탱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박물관이란 본디 느림의 공간이다. 낯선 공기를 들이마시며 수백 년을 건너온 유물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일, 텅 빈 전시실에 혼자 남아 그림의 질감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 느린 시간의 밀도야말로 박물관 경험의 본질에 가깝다. 아이러니컬하게도, AI 기술은 이런 ‘느린 경험’을 위협하는 동시에 오히려 복원하는 동반자가 될 가능성도 품고 있다. ‘느린 후속 경험’을 기획하는 것은 방문객에게 ‘한 번의 소비’가 아니라 ‘오래가는 관계’를 선사하는 방식이다. 관람객이 자신만의 리듬으로 예술과 만날 수 있도록, AI를 ‘속도의 조율자’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우선, 몰입을 돕는 해설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디지털 해설 앱에 ‘깊은 생각 모드’를 제공해 이 모드를 선택하면 AI가 관람객의 시선을 작품 하나에 집중시키고, 관련 맥락을 짧은 이야기로 풀어준다. 해설이 끝난 뒤에는 3분간 ‘침묵의 시간’을 권유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잠가 그 순간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또 박물관에서 관람객이 전시 AI 챗봇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할 때, 일정 횟수를 넘으면 “이제 잠시 작품 앞에 서 보시는 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건네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술이 모든 답을 즉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사유를 유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관람 후 후속 경험을 제공하는 데도 AI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몇 박물관이 AI 기반 전시 추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부분 추천에만 그치고 있다. 더 나아가 관람자가 전시를 마친 뒤 일주일쯤 지나 맞춤형 이메일을 받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이메일에 관람 중 가장 오래 머문 작품의 뒷이야기와 더 읽어볼 만한 자료를 담아 전달한다면, 관람객에게 의미 있는 후속 경험을 선사하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AI 시대를 맞은 박물관 홍보 담당자로서의 바람은, 박물관이 언제든 손쉽게 소비되는 ‘콘텐츠 숍’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한 사람의 감각을 일깨우는 느린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결국 박물관 본연의 가치를 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깊은 몰입과 긴 호흡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우아한 도구’가 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