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타인의 언어로 말하기

입력 2025-04-08 18:43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탄핵 정국이 몰고 온 후폭풍은 상상 이상이었다. 광장의 촛불과 태극기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진실을 믿었다. SNS는 분노로 들끓고, 친구끼리도 정치 이야기를 꺼내기 무서워졌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설득의 대상이 아닌 제거해야 할 ‘타자’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물학 시간에 배운 ‘세포막’이 떠올랐다.세포는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얇고 투명한 막을 갖고 있다. 그 막은 생명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교류의 통로이기도 하다. 단단하게 닫히면 세포는 자신을 지키겠지만, 결국 바람도 빛도 들지 않는 방 안에서 천천히 죽어간다.

우리는 지금, 너무 완벽히 닫힌 세포가 아닐까.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차단해 버렸다. 진보는 보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보수는 진보를 두려워한다. 경계는 점점 두꺼워지고, 그 사이에 흐르던 인간적인 온기는 서서히 사라졌다.

정신과 의사인 나는, 갈등과 단절이 만들어낸 상처들을 매일같이 들여다본다. 몇 해 전, 한 부부가 내 진료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래된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늘 제 말을 흘려듣기만 해요.”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편은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당신은 항상 나를 비난하잖아. 더는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그들에게 ‘역할 바꾸기’라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건넸다. 아내는 남편이 되어 그의 하루를 말해보고, 남편은 아내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이다. 처음엔 흉내 내기처럼 시작되었다. 아내는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늘도 회사에서 욕먹고 돌아왔는데, 집에 오면 잔소리뿐이야.” 남편은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나는 온종일 아이와 씨름했는데, 당신은 한 번도 ‘수고했다’고 말해준 적 없어.”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의 눈동자에 작은 물기가 번졌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외로워하는 줄 몰랐어.” 아내의 목소리는 떨렸고,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당신이 그토록 지쳐 있는지 생각 못 했어.” 말을 바꾸자, 마음이 움직였다. 타인의 언어를 입에 담자, 그제야 진심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닫혀 있던 마음의 세포막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지금 우리 사회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진영에 갇혀, 자신의 말만 정답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다. 진보의 눈으로 보이는 정의가 있고, 보수의 가슴으로 느껴지는 진실도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느 쪽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으로 세상을 한 번쯤 바라보는 일이다. ‘역할 바꾸기’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잠시 살아보는 연습이다. 그것은 경계 바깥의 온도를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나’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잠시 걸어나와, ‘우리’라는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일이다.

세포막은 생명을 지키되, 생명을 소통하게 한다. 닫히되, 완전히 닫히지 않는 것. 그것이 건강한 세포의 조건이듯, 건강한 사회 또한 그렇게 숨을 쉬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세포막 너머로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손끝에 닿는 따뜻함이야말로, 얼어붙은 이 시대를 녹이는 첫 햇살이 될 것이다.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쯔양·닥터프렌즈·닥터딩요와 함께하는 국내 최초 계란 축제 '에그테크코리아 2025' 개최
  • 흰자는 근육·노른자는 회복…계란이 운동 식단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 [에그리씽]
  • 홍명보호, 멕시코·남아공과 A조…'죽음의 조' 피했다
  • 관봉권·쿠팡 특검 수사 개시…“어깨 무겁다, 객관적 입장서 실체 밝힐 것”
  • 별빛 흐르는 온천, 동화 속 풍차마을… 추위도 잊게 할 '겨울밤 낭만' [주말N축제]
  • FOMC·브로드컴 실적 앞둔 관망장…다음주 증시, 외국인 순매수·점도표에 주목
  • 트럼프, FIFA 평화상 첫 수상…“내 인생 가장 큰 영예 중 하나”
  • “연말엔 파티지” vs “나홀로 조용히”⋯맞춤형 프로그램 내놓는 호텔들 [배근미의 호스테리아]
  • 오늘의 상승종목

  • 12.05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133,998,000
    • -2.86%
    • 이더리움
    • 4,543,000
    • -4.24%
    • 비트코인 캐시
    • 842,500
    • -2.38%
    • 리플
    • 3,051
    • -2.71%
    • 솔라나
    • 200,200
    • -3.84%
    • 에이다
    • 624
    • -5.02%
    • 트론
    • 429
    • +0%
    • 스텔라루멘
    • 361
    • -4.5%
    • 비트코인에스브이
    • 30,400
    • -2.25%
    • 체인링크
    • 20,480
    • -4.07%
    • 샌드박스
    • 210
    • -6.25%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