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노인의 외로움, 그리고 봄

입력 2025-03-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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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이제 다 죽고 나만 남았어. 더 살 의미가 없어.” 87세 노인은 무덤덤했다. 친구들이 다 죽었다고 했다. 저녁이면 일 끝나고 술 한잔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하나둘 아프기 시작했고, 어떤 친구는 암에 걸렸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고관절이 부러졌다. 치매가 왔다는 친구도 있었고, 그나마 자주 만나는 친구는 간밤에 죽었다. 노인은 하나둘 친구들이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삶 역시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젊었을 때도 친구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때는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라 그저 슬퍼하기만 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인생에서 펼칠 것을 못 펼치고, 누릴 것을 못 누리고 떠난 젊은 친구의 죽음이 애통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기적인 마음도 갖는 것이 젊을 때 친구의 죽음이다. 사고라면 ‘나도 조심해야지’, 병이라면 ‘이참에 건강 검진을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젊은 친구가 떠나면, 나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살 만큼 산 노인에게 친구의 죽음은 나도 이제 남은 삶이 얼마 없음을, 무언가를 이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낸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다. 이제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공허다. 외로움과 공허 속에서 노인은 혈압약을 타 갔다. 그는 다음 달까지 매일 아침 약봉지를 입에 떨어 넣을 것이다. 다 죽고 나만 남은 삶을 연명케 하는 것은 이 약봉지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봄이 다시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나뭇가지들이 새싹을 터트리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지난겨울 죽었던 것 같았던 생명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또 살아났다고 외치는 것 같다. 이 봄의 생명력을 노인은 보았을까? 친구의 부고 소식을 비집고 들어온 봄 향기를 노인이 맡았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으로 나는 이 약봉지가 노인에게 하나의 의미이기를 바라면서 처방전을 주었다.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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