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혈액형 소동

입력 2023-03-22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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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새빛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아기가 타고 있어요.’ 차 뒷면에 쓰인 글귀를 보게 된다. 이에 더해 ‘아이부터 구해주세요. Rh+ A형’ 혈액형까지 자세히 써놓은 부모들도 종종 보인다. 아이부터 구해달라는 절절한 자식 사랑이야 이해해도 혈액형은 의사가 보기에는 괜한 일로 느껴진다. 아주 응급한 상황이어도 써놓은 글귀를 믿고 수혈할 의사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어도 잘못된 혈액이 들어갈 경우 벌어질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혈액형은 수혈 전에 다시 한번 검사로 확인한다.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도 신생아실에서 가끔 왜 혈액형 검사를 안 해주느냐며 항의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신생아 때 하는 혈액형 검사는 정확하지도 않고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구구절절 설명해도 그들을 납득시키기에 어려울 때가 많았다. 나중에 보니 보통 일반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생할 경우 혈액형 검사를 다 해주기 때문에, 부모들은 으레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신생아에게 하게 되는 선천성 대사이상 검사와 혈액형 검사 결과를 출생 후 1~2주 사이에 들으러 오게 된다. 여느 때와 같이 결과지들을 미리 정리하고 있던 간호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원장님, 오늘 오후에 결과 들으러 오는 아기 부모님인데요. 엄마가 A형이고 아빠가 O형인데 아기가 B형으로 나왔어요. 어떡하죠?”

이게 무슨 아침드라마 같은 이야기인가.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본다. 엄마 혈액형은 출산 전에 검사한 것이므로 틀릴 일이 없다. 첫째, 아빠 혈액형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둘째, 신생아 시기의 혈액형 검사는 오류가 종종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는 6개월쯤 후에 검사를 다시 해보도록 권한다. 그리고 마지막 가능성은 막장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전개가 펼쳐지는 것이다.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이 아빠에게 설명을 하였다.

“아기 혈액형은 Rh+ B형이네요. 아버님 혈액형은 언제 어디서 검사하신 거죠?”

“얼마 전에 수술 때문에 병원에서 한 것이라 틀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생아라서 검사가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어요. 6개월 때 다시 해보는 걸 권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한국어가 서툰 베트남인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빠도 표정이 담담한 듯 보여 다행히 진료실에서 싸움이 일어나진 않겠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병원 문이 닫히면서 들린, “그래서 누구 애야?” 하는 격양된 아빠의 목소리에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이후 그 가족을 진료실에서 만나지는 못해 혈액형 소동의 진실은 결국 알 수 없게 되었지만, 혈액형 검사지를 볼 때면 가끔 그 서늘한 순간이 떠오른다.유새빛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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