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상상력이라는 마술

시인, 인문학 저술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상상세계를 갖고 산다. 꿈, 환각, 시각망상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상상세계! 소녀는 인형놀이를 하며 상상세계를 현실로 옮겨놓는다. 인형놀이에 참여하는 가족은 현실의 가족과는 다르다. 소녀의 상상이 빚은 인물들이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소녀의 상상세계는 내면의 현실이다. 현실이 그 상상세계를 감싼다. 우리는 두 겹의 현실을 동시에 사는 셈이다. 인간의 시각이 미치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보려면 상상을 해야 한다. ‘상상하다’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는 뜻이다. 물론 이건 상상 주체의 자발적인 의도에서 출발한 행위이다. 상상하는 자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비실재인 대상을 실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듯 상상이란 가로지르는 능력, 연상 행위를 통해 없는 것을 눈앞에 불러내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이것과 저것의 유비를 통해 상징과 은유를 만들고, 여기에 없는 것을 눈앞으로 불러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이다. 이것은 감각을 확장하고, 원격표상을 가능케 한다. 이토록 놀라운 창조의 역량은 저 무의식에서 원형과 이데아를, 더 나아가 시와 동화와 기호와 신화를 이끌어낸다. 호모 사피엔스가 모든 영장류에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상상력을 가진 덕분이다. 상상력은 건축, 농업, 야금술 등을 거쳐 인류 문명의 풍부한 원천으로 작용했다. 만약 인류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얼마나 척박하고 빈곤했을 것인가!

‘상상하다’는 ‘욕망하다’로 치환될 수가 있다. 상상은 곧 욕망이 불러온 행위이다. 상상 행위에서 대상은 언어적 표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나타난다. 상상은 지금 여기에 없는 대상을 이미지로 떠올리기, 부재와 결핍을 이미지로 바꾸기, 이미지로의 지각이 곧 상상이 낳은 결과물이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원재료를 갖고 이미지를 빚는다. 이미지는 의식이다. 보통 사람은 보는 것을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만 본다. 오직 상상력의 천재들만 아는 것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본다. 상상력은 다른 말로 바꾸면 상상의 연금술이다. 이것은 꿈과 기억을 뒤섞음으로써 생생한 이미지를 빚는 행위다. 사르트르는 상상력의 행위가 마술적 행위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비실재를 실재화하는 상상력은 일종의 주술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영감의 촉매제이고, 인식의 진화와 언어의 발달에 기여한다.

상상력은 마치 잿더미에서 금빛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불사조와 같이 우리의 기억과 욕망에서 솟아나온다. 기억은 우리 정체성과 자아의 근거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사는지를 아는 것은 기억의 힘이다. 기억이 있기에 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하나의 동일성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복잡성을 포용하는 이 기억에 근거해서 삶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나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항상 기억의 연장선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존재를 빚는 질료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기억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준다. 기억이 단절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거나 자아가 여럿으로 분열할 테다. 우리는 모든 기억을 다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살아보니, 알겠다. 망각은 기억의 일부이자 기억을 운명으로 바꾼다는 것을. 망각은 텅 빈 에너지가 아니라 “기억의 살아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을 선택하는 것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을 배제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기억이란 시간이고, 장소이며, 그것들 속에 빚어지는 삶이다. 우리는 실재이자 상상의 삶인 이것 안에서 기억을 파먹으며 거주한다. 어쩌면 기억은 날마다 “뇌에서 벌어지는 서커스”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자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의 뇌에는 800억 개가 넘는 뉴런이 있고, 피질과 뉴런에 있는 1000개에서 1만 개 사이의 축삭돌기 말단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뇌세포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날마다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냅스와 기억은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인간 뇌의 시냅스들이 기억에 관여하고, 거꾸로 기억은 시냅스의 형태와 수를 변형시킨다. 기억에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두 종류가 있다. 단기 기억은 작업 기억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뇌에 응고화하는 형태의 흔적 없이 몇 초간 있다가 사라지는 기억이다.

터키의 한 반체제 작가가 날조된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 작가의 이름은 아흐마트 알탄이다. 그는 어느 날 새벽에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 체포되어 독재 정부의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여생을 감옥에서 다 보내야만 한다. “내가 잠자리에(철제 침상 위에서 정부의 직인이 찍힌 담요를 덮고)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들은 창문에 박혀 있는 쇠창살과 중정 위를 덮고 있는 철창이다.”(‘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감옥에 갇히면서 세상과 차단되었다. 그가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꿈과 상상뿐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주 꿈을 꾼다. “어떤 여자,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꿈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몸매. 흔히 볼 수 있는 옷을 입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잠깐 모습을 보였다가 곧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수인은 감옥 바깥에 있는 대상을 볼 수가 없다. 수인이 감옥 바깥에 있는 어머니, 형제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가족을 보려면 단 한 가지 연상 작용을 통할 수밖에 없다. 수인의 신체는 감옥의 벽과 창을 가로막은 창살을 뚫고 나갈 수 없지만, 의식은 무엇이라도 뚫고 자유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의식은 꿈을 꾸고 상상을 할 수 있다. 감옥이라도 꿈과 상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우리 안의 고삐 풀린 기억과 생각, 욕망과 두려움에서 꿈이 발생하고 활개를 친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꿈이란 우리 안의 신이다. 혹은 광인이다.” 꿈이란 비이성성에 의한 반란 사태에서 의식은 고삐 풀린 통제 불가능한 사태로 날뛴다. 우리는 꿈과 상상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빚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꿈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낯선 장소로의 이탈이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의식의 존재다. 상상력이 추측과 예단을 하고, 추론과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의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상상하는 대상의 우발적 풍부화에 도달하는 가장 강력한 조건이다. 경험과 기억에 상상력이 보태질 때 우리 감각은 갱신하고, 세계를 놀라운 황홀경 속에서 다시 볼 수 있게 이끈다. 동물은 왜 제 존재의 지평을 저 너머로까지 뻗지 못한 채 지금 여기에 구속된 즉물적 존재에 머물까? 그것은 동물에게 상상력이 부재한 까닭이다. 동물은 겨우 제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에 전념하는 물질 덩어리로 만족한다. 동물이 제게 주어진 현실 조건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데 반해 인간은 새로운 도구 사물의 발명을 통해 자기 필요에 부응한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인지 능력의 차이다. 상상력은 지각, 기억, 연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지 능력의 일부다. 사물과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은 상상하는 존재로서 실재를 넘어서서 한 단계 더 높은 차원, 또 하나의 세계로 도약할 수가 있다. 사람은 상상력으로 단조로움을 거부하고, 자기 한계에 저항한다. 우주를 창조한 신을 상상하고 종교를 창안하며,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태초의 낙원과 무릉도원을 빚는 것도 인간이다. 단군신화나 창세기의 천지창조 신화, 그리스 로마의 신화 들은 다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력은 산술적인 평균의 생각을 공중으로 띄우는 부력이다. 생각을 더 높은 허공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힘은 자주 마술을 부린다. 예술의 화사함은 곧 상상력의 화사함이다. 수학과 천문학, 철학과 예술이 발달한 것은 다 상상력 덕분이다. 상상력이 없다면 그림, 음악, 문학 같은 예술은 더 단조로울 것이다. 상상력은 분명 우리 삶의 풍부화에 기여한다. 만일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볼품없이 쪼그라들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