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놀이터] 환경불안·기후우울 시대

입력 2021-11-26 05:00

이난영 과학 칼럼니스트

조금 지난 얘기지만 한 남자배우가 영화 홍보를 위해 출연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신이 항상 들고 다닌다는 만물가방을 공개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가방 안에는 컵라면이나 즉석밥처럼 그럴 만하다 싶은 물건도 있었지만 ‘아니 저런 걸 왜 매일 들고 다니지?’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기상천외한 내용물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순간 미국처럼 대규모 자연재해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국가에선 집 안에 생존을 위한 만물가방을 구비해 놓는 경우가 흔하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그 가방을 개인의 재미난 특이취향 정도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시쳇말로 웃음을 다큐로 받는 것일 수 있지만 잠시나마 ‘나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저런 비상용 가방이 하나쯤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말하자면 내 안에 숨어있던 자연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온 셈이다.

대응이란 단어를 입에 올려 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한 지역을 집어삼키는 해일이나 지진 혹은 토네이도는 더 이상 재난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그 발생 빈도도 증가하고 발생지역 역시 확산되는 가운데 이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나 네덜란드,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에서는 불안을 느끼는 원인으로 일자리나 사회안전망보다 환경을 꼽는 수치가 더 크게 나오기도 한다. 또한 호주에서 실시된 최근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이 코로나보다 기후변화 때문에 더 큰 스트레스와 불안을 경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느리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후변화 영향을 지켜보며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넘어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는 걸 ‘환경(혹은 생태)불안(eco-anxiety)’이라 한다. 이 용어는 1995년 미국의 역사학자 시어도어 로작(Theodore Roszak)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됐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환경불안이란 환경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환경이 파괴된 미래의 삶을 생각할 때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이 불안을 겪는 이들의 심리상태는 로작 교수가 말한 것보다 좀 더 심각하다. 환경불안을 겪는 이들이 자신의 감정상태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분노, 슬픔, 무력감 그리고 두려움 등이라고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불안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일상을 영위하거나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환경불안은 기분부터 일상 그리고 관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우리는 기후변화가 정신건강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일련의 연구 결과들을 모른 척 무시할 수가 없다. 이유는 많지만 무엇보다 환경불안 혹은 기후우울(climate grief)이 젊은 세대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점 때문이다. 지난 9월 의학저널 란셋(TheLancet)에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베스대학교(University of Bath) 엘리자베스 막스(Elizabeth Marks) 교수 연구팀은 10개국 16~25세 청소년 1만 명을 대상으로 기후변화가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설문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80% 이상이 환경불안-이 연구에서는 기후불안(Climate Anxiety)이라는 용어가 사용됨-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들 중 불안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답을 한 비율이 60%에 달했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지 모를 미래 환경에 대해서만 불안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이나 자기 후손의 행위가 이 지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에도 큰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때문인지 환경불안을 겪는 젊은 성인들 중에는 자녀를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란 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과학저널리스트 대니얼 골만(Daniel Goleman)은 불안이란 명칭에도 불구하고 환경불안은 치료해야 할 병리가 아니라 직면한 생태위기에 대한 합리적인 심리적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가릴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불안에 압도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는 적극적 행위가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 역시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는 기후우울을 앓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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