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도의 세상 이야기] 인생 이모작

입력 2020-05-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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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융합얼라이언스추진단 회장(서울대 객원교수)

몇 해 전 퇴직하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재미를 느끼면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에 힘입어 시간이 나면 붓을 잡는다. 처음에는 수채화를 그렸는데 얼마 전부터 수묵화를 배우고 있다. 둘 다 물감을 물에 개어 그리는데, 수묵화는 따로 밑그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정도 불가능해서 붓 놀림이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동양화가 현실보다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이란 말이 실감난다.

더러 지인들이 왜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특히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내 시간이 생겨 취미로 그린다”고 했다. 그랬더니 왜 다른 취미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림이냐고 묻는다. 이 경우는 질문하는 사람도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답이 길어진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군 단위에 있는 초등학교를 2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2학기에 아버지 직장을 따라 도시로 전학을 갔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입시가 있어서 소위 명문 중학교를 보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더군다나 학군제도 없어서 내가 전학한 초등학교는 전교 학생 수가 1만 명을 웃돌았다. 학생 수가 워낙 많아 2부제 수업을 하였는데 한 반에 100명이 넘었다. 매달 시험을 보는데 결과가 나오면 성적을 공개해서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시골에서 막 올라온 나에게 당장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와 같았다.

당시 어린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매주 있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을 운동장에 도열시키고 조회를 하였다. 그곳에서 성적 우수자나 외부 수상자에게 표창을 주고 나서 훈화 말씀을 하였다. 그 무렵 마이크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6학년 학생부터 도열을 하였기 때문에 저학년은 뒷줄에 서 있어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지루하기만 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시간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3학년 어느 날 이 행사가 갑자기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되었다. 당시 지역 언론사에서 매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도 사생대회를 개최하였다. 일반적으로 공원에 가서 그림을 그려서 제출하였는데, 수상에 대한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고 사생대회 후 친구들끼리 노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공원 풍경을 그려서 제출하고 신나게 친구들과 놀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갑자기 신문사에서 연락이 와서 부모님과 함께 오라는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가니 몇몇 학생들이 와 있었다. 신문사 관계자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도 사생대회 초등부 최고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별한 그림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가 최고상 수상자라니. 며칠 후 나는 영광스럽게도 전교 학생들이 도열한 조회시간에 연단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기쁨과 함께 그 연단에 다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그후로 사생대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출품하면 최고상은 아니어도 특선, 가작 아니면 입선이라도 했다. 교내 특별활동 모임도 미술반을 가입하였다. 한참 그림에 대한 열정이 올라오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개입하셨다. “시골에서 올라올 때 그림 그리라고 온 게 아니다.공부를 해야지.”

그런 다음 특별활동반도 독서반으로 바뀌었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 고학년으로 가면 미술은 소위 기타과목이 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2학년까지 미술 시간이 있었지만 3학년부터는 입시가 거의 전부인 생활이어서 자연스레 붓을 잡을 기회도 없어졌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 맡겨진 업무와 경쟁으로 다른 취미를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30대 후반에 해외 국제기구에 근무할 기회가 생겼다. 외국인 동료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는데,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 친구들이 자전거 조립, 사진, 악기 연주 등 사소하지만 한 가지라도 모두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시간이 나면 술 마시고 함께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부터 나도 언젠가 취미를 가지고 싶었고, 그림을 그렸으면 생각했다.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고.

드디어 어느 날,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니 기회가 왔다. 그림을 배우러 취미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한 달여 간단한 소묘를 배우고 나서 수채화를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어 가면서 성취감과 함께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끔 완성된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리면 많은 페친들이 ‘좋아요’ 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수많은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정하거나 덧칠할수록 완성도가 높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고민의 순간, 그림 선생님의 한 말씀이 계속해서 붓을 잡게 한다.

“저처럼 그리고 싶으시지요. 저는 평생 그림만 그렸는데 웬만해서는 어려울실 겁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제가 가지지 않은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잘 그리려고 하기보다, 비우고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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