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 차주란, 자동차의 주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약 2년 전, 챗GPT에 대출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금융권 용어 '차주'를 담은 문장 하나를 주고, 뜻 해석을 부탁하자 돌아왔던 답변입니다. 앞뒤 단어들만 조금 살피면 '은행' '빚' 등 '금융권'에서 쓸 만한 용어들이 가득한 데도 챗GPT는 차주를 자동차의 소유자라고만 답한 것입니다.
지금 다시 물어보니 "차주는 돈을 빌린 사람, 즉 대출받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답합니다. 이전엔 왜 그랬는지 묻자 "그땐 제가 아직 문맥 파악력이 살짝 부족했던 시절이라 부끄럽다"며 "지금은 질문 속 단어, 문장의 분위기, 사용하는 분야까지 고려해서 (단어 뜻을) 상황별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며 핑계(?)까지 댔습니다.
점점 똑똑해지는 생성형 AI 기반 챗의 모습입니다. 유료 구독으로 챗GPT를 쓰고 '잘 쓰는 법'을 공유하며 개인 상담용부터 분석용으로까지 다양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지금, 금융권에서의 AI 활용은 어디까지 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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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사들은 AI를 주로 '내부 직원 업무 효율 개선'에 활용 중입니다. 업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사업, 서비스를 도입한 뒤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쳐 대고객 서비스에까지 확대 적용하겠다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입니다.
KB국민은행은 영업 지원을 위한 AI 에이전트(Agent) 개발, 적용을 추진 중입니다. 고객이 질문하면 대화 상담을 제공하는 금융상담 에이전트와 프라이빗뱅킹(PB) 업무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PB 에이전트', 기업금융(RM)업무를 효율화하기 위한 'RM 에이전트' 개발도 추진 중입니다. 국민은행은 앞으로 AI 기술 활용이 늘어남에 따른 기본권 침해 등 윤리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지난달 자체 'AI 거버넌스'도 수립했습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12월 초 생성형 AI 기술을 대출 상담 업무에 적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4월 선보인 예·적금 상품 상담용 'AI뱅커' 서비스에 이어 대출 상담까지 비대면으로 할 수 있도록 서비스 영역을 넓힌 것입니다. 직원의 업무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구축한 'AI 지식상담 서비스'도 계속 고도화해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조직 현황을 통해서도 AI 활용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은 DT추진본부와 AI데이터혁신본부를 AI·DT 추진그룹으로 통합하고, 기존 금융AI센터를 AI1, AI2 센터로 확대했습니다.
신한은행은 고객 솔루션 그룹 내 디지털혁신단 산하에서 AI유닛과 AI연구소를 운용 중입니다. 하나은행은 금융 AI 전담 사업을 추진하는 AI·디지털그룹을 디지털혁신그룹으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우리은행은 디지털전략그룹 DI 추진본부 아래 AI플랫폼부를 운영 중입니다.
전사적으로 효율적인 AI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플랫폼 구축 작업도 한창입니다. 앞서 올 2월 NH농협금융지주는 은행을 중심으로 ‘생성형 AI 플랫폼 구축’ 사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AI 데이터 관리 체계를 구축해 전 계열사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려는 조치입니다. 농협은행은 플랫폼에서 △AI 기반 문서관리 △지식정보검색 서비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고객 맞춤형 마케팅 문구 생성 △기업 고객 대상 정책자금 지원 추천 서비스 등으로 직원 업무 역량을 향상시키고 고객 경험을 개선할 방침입니다. 서비스는 6월 말에 시작됩니다.
KB금융은 이달 중 '그룹 공동 생성형 AI 플랫폼' 오픈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금융은 올 8월 우리은행을 중심으로 생성형 AI 플랫폼 '젠(Gen)-AI'를 구축합니다. 신한금융도 최근 전사적인 생성형 AI 플랫폼 도입을 검토 중입니다.
저축은행업권도 AI 활용 서비스 개발에 한창입니다. 애큐온저축은행은 지난해 10월 '생성형 AI 직원용 챗봇' 개발에 착수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임직원이 업무 매뉴얼과 사내 규정사항에 대한 질의, 고객 문의 사항 등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입니다. 앞서 웰컴저축은행도 생성형 AI 시스템 구축에 나섰고, 모아저축은행은 모바일 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 'AI 기반 실시간 안면인증' 기능 등 AI 기술 도입에 돌입했습니다.
AI 활용 금융서비스는 앞으로 더 고도화하고, 활발히 개발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금융당국이 '금융권 생성형 AI 활용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금융권 AI 활용에는 당국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보안 규제, 양질의 AI 학습데이터 부족과 불확실성 등으로 인해 민간 시장에만 맡기면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지난해 8월 금융당국은 '금융분야 망 분리 개선 로드맵'을 발표해 샌드박스 제도로 인터넷 활용 제한 등에 대한 규제 특례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금융회사의 생성형 AI 활용을 허용했습니다. 12월에는 9개 금융사의 AI기반 서비스 10건을 혁신금융서비스로 처음 지정해 제공을 본격화했습니다. 신한은행의 'AI 은행원'과 '투자 및 금융지식 질의응답(Q&A) 서비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지난달 말부터는 국내 금융권에 특화한 서비스 개발을 위해 대규모 한국어 언어자료 집합 '금융 특화 한글 말뭉치'를 민간 금융사들에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정책·제도·법규·가이드라인 등을 반영한 '국내 금융시장 맞춤형' 서비스 개발, 고도화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올 6월이면 금융권 AI 플랫폼도 나올 예정입니다. 금융권 오픈소스 AI의 설치‧활용을 지원하는 창구로, AI 인력과 인프라가 부족한 금융사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범사업 과정에서 '금융결제원 데이터 공유 플랫폼'에서 지원되는 말뭉치도 상반기 중 '금융권 AI 플랫폼'으로 옮겨가 제공될 방침입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플랫폼 구축보다 먼저 말뭉치를 제공하게 된 것에 대해 "데이터를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는 금융사들의 요청이 많았다"며 "수요를 반영해 말뭉치부터 시범사업으로 지원하는 것이고, 이후 플랫폼이 구축되면 데이터 제공 채널을 플랫폼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금융사들의 불확실성을 덜어줄 '금융 분야 AI 가이드라인'도 개정됩니다. 개발과 활용 단계에서 각각 지켜야 할 원칙의 적용 기준을 제시하고, 생성형 AI 윤리 등을 담은 사례, 설명이 담길 예정입니다.
노성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26일 열린 '금융권 생성형 AI 활용 방안' 세미나에서 "금융 AI 가이드라인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변화하는 기술의 세부 사항에 대해 중립적인 기준을 제시해 시의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안정과 혁신의 균형, 기존 규제와의 연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민간 금융사의 생성형 AI 기술 활용에 힘을 보태 금융당국이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금융당국 측은 민간 금융사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해 금융소비자 효용 증진·보호 강화에 힘쓸 것을 당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특화 보험상품 개발 △신용평가모델 고도화를 통한 중금리 대출 확대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 고도화를 통한 부정거래ㆍ신종사기 시도 차단 등을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은행, 증권, 보험사를 이용하는 금융소비자들은 향후 당국에서 기대하는 이 같은 효과가 잘 체감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생성형 AI 활용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개인정보 유출, 생성된 답변의 부정확성 등 한계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사가 당장 눈에 보이는 고객 기반 서비스를 내놓는 것보다, 자체적인 윤리원칙이나 조직 기반을 먼저 다지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손재희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9월 열린 '생성형 AI의 금융서비스 적용과 이슈' 세미나에서 "보험산업 내 AI 적용은 생산성 제고 및 소비자 편익제고 등 긍정적 효과가 기대되지만 신뢰성과 편향성, 저작권 이슈, 악의적 사용에 의한 오정보 생성 및 확산 등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사용 데이터의 정확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은행의 경우 생성형 AI의 편향이 성별, 인종, 민족을 기반으로 한 프로파일링 문제를 지속시켜 불공정한 신용평가와 고객차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