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김정일 국방위원장 일대기

입력 2011-12-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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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 년동안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7일 사망했다.

김정일 정권이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한 것은 그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 이후지만 공식 출범은 1998년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이후 부터이다.

그는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임을 내외에 선포한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37년간 북한을 통치해 왔다.

◇불우한 어린시절 권력다툼과 함께 자라 =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김정일은 1942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으로 알려졌다.

그는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슬픔을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한국전쟁(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그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휴전 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가족과 권력투쟁 불사하고 권력장악 = 김 위원장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을 축적했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지냈다. 특히 예술부문을 통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각시켜 후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일성의 신뢰를 확보한 김정일은 당시 2인자였던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계모인 김성애 등을 숙청했다.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오른데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당 조직지도부를 확대해 모든 인사권과 통제 및 감시권을 가진 핵심부서로 만들었다.

그는 ‘군에 대한 당의 영도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군 인사권을 당 조직지도부로 이관해 통제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경제분야에서도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 시스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소속시키는 ‘당 경제’를 조성했다.

국가권력 전반을 사실상 장악한 김정일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통해 군인이 아닌 인물로는 유일하게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임명됐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까지 마무리했다.

◇‘고난의 행군’ 시대…파격행보·미완의 변화 =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는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통제기능은 마비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핵문제 대립, 중국과 러시아와는 한국과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상태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군부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유훈통치’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이 된 그는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최고지도자가 됐다.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다. 그는 경제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을 극복하려 했다. 2002년에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의 외교적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그는 남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교류를 추진했다. 2000년에는 반세기만의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며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또 김 위원장은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했다.

그는 동유럽의 붕괴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국제적 환경의 변화를 인정한 적극적인 서방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선군정치 논리에 파묻혀 핵과 같은 대량살상무기(WMD)문제를 풀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으로 국제적인 고립상황에 처했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위원장은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했다. 2010년 9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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