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국기를 주제로 한 광상곡

입력 2016-08-3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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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3년 12월 17일 첫 대통령 취임사는 “단군 성조께서 천혜의 이 강토에 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 이렇게 장중한 문사(文辭)로 시작되지. 여기에 언급된 국기는 ‘나라를 이루거나 유지해 나가는 터전’, 즉 國基인데, 요즘 잘 쓰이지 않는 말이야. 국기라면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라는 노래나 ‘국기(國技) 태권도’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잖아?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국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국기 문란이라는 말을 벌써 세 번이나 했거든. 아버지가 말한 국기가 아니라 國紀, 나라가 바르게 나아가는 데 기틀이 되는 질서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박 대통령은 2013년 8월 남북정상회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유출 논란이 일자 국무회의에서 “중요한 사초가 증발한 전대미문의 일은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지적했어. ‘일’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와 듣기 거북하지만 그만큼 큰일이라는 뜻이었겠지.

이어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때인 2014년 12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지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문건을 외부에 유출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라고 두 번째로 질타했어.

그리고 올해 8월 19일에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감찰한 내용을 유출했다며 김성우 홍보수석을 시켜 “현행 법을 위반한 중대 사안”이라며 “국기를 흔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게 했지. 우 수석 사퇴 요구라는 ‘불순한 청와대 흔들기’에 굴하지 않겠다고 말한 셈이야.

그러나 그게 과연 국기 문란일까? 유출했다는 감찰 내용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어서 법리적 해석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각종 의혹에 휩싸인 민정수석을 29일 사표를 낸 이석수 씨와 달리 현직에 그대로 둔 채 특별감찰과 검찰 수사를 받게 하고, 검찰의 압수수색도 티가 나게 다르게 하고, 공직 인사검증을 계속 맡게 해 하자가 있는 인물을 골라 임명하는 것, 이런 게 국기 문란이지.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고도 경찰 신분을 숨겨 징계를 피한 사람이 경찰청장에 취임해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본연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자”고 외치니 웃기지 않아?

“인사가 만사”라는데 박 대통령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만 가려 쓰는지, 정말 왜 그러는지 궁금해. 국기라는 말에는 ‘나라를 맡아 다스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 즉 國器도 있어. 그런 인물을 고르고 골라 써도 국가 운영이 어려울 텐데 국기를 찾기는커녕 사기(邪器)만 그러모으니 여기저기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이 어지럽고 국기가 문란해질 수밖에.

연암 박지원의 반남박씨 집안과 창애 유한준의 기계유씨 집안은 긴 세월 원수였어. 창애 유한준은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모으게 되나니…”라는 말의 주인공(“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운운은 잘못 알려진 말)이야. 그런데 홍문관 대제학이었던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향시(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창애의 현손 유길준(‘서유견문’의 저자)을 불러 화해를 했어. 박규수는 15세 소년이 국기임을 알아보고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화목하게 지내자”며 격려했대. 유길준은 그를 통해서 개화에 눈을 떴고.

인물이라면 이렇게 원수도 마다하지 않고 만나고 키워주는데 우리 대통령은 왜 그러지 못할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런 판에 대우조선해양의 향응을 받은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뉴스경남이라는 지방 신문이 회장 아들(그 신문의 경영부장)의 결혼을 1면에 ‘알림’기사로 실어 조롱거리가 되고 있으니 언론마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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