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행복은 큰돈이 들지 않는다

입력 2018-11-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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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저 강원 산간 지역엔 첫눈이 내리고 얼음도 얼었다. 하지만 낮은 지대에는 가을볕의 달콤한 온기가 지면을 덥히고, 산기슭엔 구절초가 꽃을 피운 채 바람에 살랑인다. 집을 나서서 주택과 텃밭이 섞여 있는 곳을 거쳐 몇 걸음 나아가면 숲속 산책길이 열린다. 교하도서관 뒤편을 거쳐 중앙공원까지 이어지는 숲속 오솔길엔 가을이 한창이다. 단풍 든 나무들이 서 있는 숲길은 가랑잎으로 덮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오솔길의 노랫소리를 들으려고 더 자주 숲길 산책에 나선다.

일조량은 줄었지만 가을의 남은 며칠은 찬란하게 빛난다. 키가 훌쩍 자란 파초가 있는 마당에서 낮닭이 울고, 공기에서 잘 익은 밤 굽는 냄새가 나는 이 계절이 정말 좋다. 청명한 하늘과 유순한 빛, 그리고 가을 저녁이 주는 평안함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내가 늙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봄을 점점 더 두려워하는 반면 가을을 더 좋아한다”라고.

어렸을 때 산에서 새를 잡고 나비를 잡던 시절에는 새순이 돋는 나무와 피어나는 꽃들이 하는 속삭임을 다 알아들었다. 세상의 꽃봉오리들이 열리고 햇빛은 축복처럼 쏟아질 때 나는 봄의 온갖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라, 자라라, 꽃피워라, 꿈꿔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로운 충동을 느껴라, 몸을 내맡겨라, 삶을 두려워 말라!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모험과 쾌락을 좇느라 바빴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먼 곳을 일부러 찾고, 어여쁜 여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강화도까지 다녀오는 일이나 나날이 축제인 듯 밤새워 흥청이며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종종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져 젊음을 흥청망청 쓰는 게 기뻤고, 그게 행복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 시절의 친구는 다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시들해져서 다 그만두고, 햇빛 아래에서 나른한 몸으로 책에 빠져들거나 음악에 심취하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구할 것은 죽어가는 모든 것을 두루 감싸는 덕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깨닫는 분별, 그리고 조용한 체념의 지혜다.

날마다 맞는 일상과 낯익은 사물들로 채워진 공간은 우리를 얼마나 너그럽게 포용하는가? 그것은 작지만 최소한의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연히 한 시집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시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바로 이 시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바닥이 신발 바닥을/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일/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팻 슈나이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우리의 안녕과 행복이 찻잔이 차를 담고 있고, 의자가 견고하게 서 있는 일같이 평범한 사물의 인내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는 깨달음은 놀랍지 않은가?

지난여름 베를린 여행을 다녀왔을 때 집 안의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고, 마침 거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거실 바닥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고요한 광경과 마주쳐서 울컥 솟아나는 기쁨에 당황한 적이 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낯익은 빛과 낯익은 공기에 곧 안도감을 느꼈다. 서가의 책들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옷들은 공손하게 옷장에서 우리 손길을 기다리고, 욕실의 비누는 접시 위에서 말라간다. 수건은 우리의 젖은 등에서 물기를 빨아들이고, 계단은 사랑스러운 반복운동을 한다. 우리가 날마다 누리는 안녕과 지복은 이렇듯 제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는 저 사물들의 인내심 덕분이다.

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은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다”라고 썼다. 늘 웃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이 늘 화사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예단은 틀렸다. 시인은 어쩌면 가장 불행한 조건에 처한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짓는 사실을 콕 집어낸다. 행복은 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찰나를 포착하고 향유하는 능력의 문제다. 현실의 불행에 눌린 사람도 찰나의 행복은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은 현실에 처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발명하고, 불행한 사람은 희한하게도 불행을 양조(釀造)해낸다.

뱀이 삼킨 이슬은 독이 되고, 암소가 삼킨 이슬은 우유가 된다. 이렇듯 행복과 불행은 각자의 덕목이고, 자기가 품고 있는 성분의 일부에서 비롯한다. 여름이 덥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여름의 과일인 잘 익은 복숭아나 자두를 깨물어 먹으며 그 달콤함이 주는 행복을 느껴라. 행복은 얼마나 자주 그것을 느끼는가에 달려 있다.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더 자주 행복하다고 미소 짓는 사람이 행복하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 이를테면 공기, 빛, 시간을 누리는 것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천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 어느 날 눈떠 보니 방에 천사가 서 있었다, 라는 문장을 쓸 수가 없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아무도 내게 언제 씨를 파종하는지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나는 오래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던 적이 없다. 견디기 힘들 만큼의 재난을 겪으며 뇌가 불안으로 쪼그라든 적도 없다. 전쟁으로 생명이 위협당하거나 집과 고향을 잃고 난민 수용소에서 지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수많은 삶을 겪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책들을 꾸역꾸역 읽었다. 젊은 시절 한때 단골 술집에서 보드카나 위스키를 즐겨 마셨지만 오토바이로 거리를 폭주하다가 사고를 일으키거나 마리화나나 해시시를 피우거나 코카인을 코로 흡인한 적이 없다.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힌 채 철학 책을 읽거나 음악에서 위안을 구했다. 지금은 보드카나 위스키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가끔 남들이 보지 않는 영화를 보거나 고전음악을 들으러 헤이리의 한 음악감상실을 찾는다. 날이 흐린 가을날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만 종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 아울러 더 행복해지려고 돈을 벌었다. 하지만 목마름을 해결하는 데 바다가 필요하지는 않듯이 행복해지는 데 큰돈이 필요하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갈증을 푸는 데는 단지 한 잔의 물이면 충분하듯이 행복 역시 그랬다. 행복은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지만 그것은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와 엇갈리지는 않는다.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확신 속에서 자존감과 행복감은 커진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은 지혜, 덕망, 보온력이 좋은 양말이면 족하다.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자. 혼자 끼적인 시를 친구에게 읽어주자.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르고, 해는 아침마다 떠오른다. 굳이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려고 서두르지는 말자. 곧 겨울이 온다. 새벽의 서리와 눈 덮인 소나무, 북풍과 결빙의 날은 온다. 하지만 오지도 않은 추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많은 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얼어붙는 한파가 닥치더라도 그때 가서 대처하면 된다. 새벽에 오늘 쓸 원고를 다 끝냈으니, 점심때엔 동네 국숫집에 가서 잔치국수를 먹고, 오후에는 교하 숲길을 한가롭게 걷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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