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공간] 봄편지

입력 2017-04-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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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파리는 푸르다

피가 푸르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잎 뒤에 숨어 꽃은 오월에 피고

가지들은 올해도 바람에 흔들거린다.

같은 별의 물을 마시며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내 몸은 푸르고

상처를 내고 바라보면

나는 온몸이 붉은 꽃이다.

오월이 가고 또 오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

그게 즐거워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물푸레나무에게 쓰는 편지-

좁은 마당에 물푸레나무를 기른 적이 있었다. 산에 갔다가 무릎 높이 정도의 어린 것을 파다 심었는데 3, 4년 지나자 지붕을 넘을 정도로 멀쑥하게 키가 자랐다. 그 높다란 키가 작은 나무나 화초들에게 그늘을 지우고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꽃도 잎 뒤에 숨어 피고 열매도 열리지 않는 그에 대하여 불평하기 시작했고, 어느 해 가을 나는 상당한 수고 끝에 그를 파 버렸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나라 나무 이름 중에 물푸레나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나무는 드물다. 거기다가 어린 줄기를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니….

농가에서 자란 내 기억으로는 물푸레나무는 대개 낫이나 도끼, 도리깨, 써래 등 농기구와 연장의 자루로 쓰였다. 나무의 결이 유연하고 질기기 때문에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쉽게 부러지지 않아서였다. 그것뿐만 아니다. 한때는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말썽쟁이 녀석들의 부드러운 종아리에 찰싹찰싹 달라붙었을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런데 그의 아름다운 이름에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그가 죄인을 매로 다스리는 곤장 중의 곤장이었다는 데 있다. 조선시대 형틀에 묶여 볼기를 맞는 죄수들에게 물푸레나무 곤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나라에서 다른 나무로 바꾼 적도 있었다는데 죄인들이 만만하게 보고 한 방에 이실직고를 안 하므로 다시 물푸레나무를 썼다니 물푸레나무의 명성을 알 만하다.

그래도 나는 물푸레나무가 좋다. 그게 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이름 때문이다. 같은 별에서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그의 피는 푸르고 나의 피는 붉다. 자꾸 봄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하고 또 환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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